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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구려의 역사

1차세계대전 이전 가장 많은 군대를 물리친 고구려 요동성

by 역사채우기 2021.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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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중국 수나라당나라의 수백만 군대에 맞서 민족의 방파제 역할의 중심에 있던 고구려 요동성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https://youtu.be/icOgRFWV8l8

 

 

| 수나라의 중국 통일과 고조되는 전운

589년, 수나라의 문제 양견은 중국의 남조 진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약 400년 동안 지속되었던 위진남북조 시대를 마치고 중국을 통일하였습니다.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604년, 아버지(수 문제)와 형(양용)을 죽이고 즉위한 양제 양광은 주변국 중 고구려만 입조와 조공을 거부한 일과 598년에 말갈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요서를 침공한 일로 이를 갈고 있던 터라 612년 정월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수나라 2대 황제 양광(양제)

 

기록에 따르면, 군사만 113만 3800명이었고 군량 수송을 맡은 사람의 수는 그 배가 되었다고 하니 고구려 출정에 나선 부대를 모두 합치면 3백만이 넘는 무시무시한 규모였습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 가장 많은 수의 병력이 투입된 전쟁이었습니다.

 

 

 

| 수나라의 2차 침입

2월, 양제가 친정하여 요하에 도착했고, 강을 건너기 위해 부교를 설치했으나 길이가 짧아 도하하지 못하는 수나라군을 향해 고구려군이 화살을 퍼부었고, 수나라군은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이틀 후 수나라군은 다시 부교를 만들었고, 도하에 성공하여 수나라군과 언덕을 지키던 고구려군이 전투를 벌였습니다.

강을 건널 때 쓰이는 부교(출처 : wikimedia commons)

 

 

이 전투에서는 중과부적으로 고구려군이 패하여 1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수나라 군대는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고 5월, 양제는 성을 공격하기 전

 

"모든 군대가 나아가고 물러날 때, 반드시 나에게 보고하고 나의 지시를 기다릴 것이며,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이때 요동성의 고구려군은 자주 싸우는 것이 해롭다고 생각하여 성을 굳게 수비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양제는 모든 군대에 명령하여 요동성을 공격하게 하고, 고구려가 항복할 시 그들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병사들에게 개인적인 행동을 금하였습니다.

 


요동성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고, 전투 중에 요동성이 함락될 상황에 처할 때마다 고구려군은 항복하겠다고 했으나 수나라군은 양제의 명령 때문에 결정적인 공격을 하지 못하고 양제에게 보고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양제의 명령이 떨어지면 시간을 번 고구려군은 요동성을 다시 방어태세에 돌입시켰고, 간혹 성문을 열고 나와 공격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두세 번 계속되었으나 양제는 끝내 자신의 실수를 알아채지 못하고, 성은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상황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월, 양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가서 성곽을 둘러본 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너희들은 벼슬이 높다고, 혹은 가문과 세도를 믿고 나를 어리석은 자로 취급하려고 하는가?
전일 내가 도읍에 있을 때 너희들이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것은, 단점이 드러날까 두려워했기 때문임을 알겠구나.
이제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너희들의 잘못된 행실을 판단하여 목을 베려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지금 죽는 것이 무서워 힘을 쏟지 않고 있으니, 내가 너희들을 죽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이 말을 듣고 여러 장수가 모두 놀라서 얼굴색이 변하고 무서움에 치를 떨었다.

 

 

양제는 요동성의 서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육합성을 엿보고 있었으나, 고구려군은 모든 성을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우문술, 우중문 등이 이끄는 30만의 별동대가 을지문덕에게 패하여(살수대첩) 양제가 있는 요동성으로 퇴각할 때까지 요동성은 수나라의 113만 대군에 맞서 방어에 성공합니다.

살수대첩 민족기록화

 

이듬해 613년 2월, 양제고구려와 같이 하찮은 것들이 상국을 무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국력이 바닷물을 뽑아내고 산을 옮길 수 있는데, 하물며 이런 따위의 적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라며 고구려 정벌을 논의하였습니다.

 

 

 

| 수나라의 3차 침입

4월, 양제는 또다시 친정하여 요하를 건넜고 지난번 경험을 되살려 장수들에게 사태에 따라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적절히 조치하도록 하였습니다.


수나라 군은 신성, 요동성 등을 운제, 지도와 같은 여러 무기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사면에서 밤낮으로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 역시 적절히 대응하여 20여 일이 지나도록 성곽을 방어하였습니다.

공성무기 운제(출처 : wikimedia commons)

 


이렇게 요동성을 함락하는데 시간이 지체되자, 양제는 1백만여 개의 자루를 만들어 보냈습니다.


그는 자루에 흙을 채운 후에, 넓이가 30보이며 성과 높이가 동일한 큰 둑길을 쌓게 하고, 병사들에게 그 위에 올라서서 성 안을 공격하게 하는 작전을 구상하였습니다.

 

또 한편으로 성보다 훨씬 높은 여덟 개의 바퀴 달린 고공 수레를 만들어, 새로 만든 큰 둑길에 세워 성 안을 내려다보며 활을 쏘게 하는 방법도 구상하였습니다.

 

 

이는 후일 당 태종안시성을 공격할 때 토산을 쌓았던 것과 비슷한 사례입니다.


이 방법으로 수나라군이 공격해오자 고구려군은 위협을 느껴 크게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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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산을 쌓고 안시성을 공격하는 당나라군(드라마 대조영 중에서)

 


그러나 이때 양제에게 수나라에서 예부상서 양현감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전달되었고, 고관들의 자제가 모두 양현감의 편이 되었다는 소식에 더욱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수나라의 병부시랑이자 양현감과 친분이 있던 곡사정이 고구려에 투항하였습니다.

고구려에 투항한 곡사정(드라마 연개소문 중에서)

 


곡사정의 투항으로 기밀이 새어나갔을테니 양제는 밤에 여러 장수들을 조용히 불렀고, 반란 진압의 급급함과 후미에서의 고구려군의 공격이 걱정된 나머지 군수물자와 무기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둔 채 퇴각하였습니다.


이렇게 수나라의 2차 침입에 이어 3차 침입 역시 요동성은 수나라의 침입을 막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고, 수나라는 양현감의 반란을 시작으로 나라 곳곳에서 반란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 수나라의 4차 침입

하지만 614년 2월, 양제는 백관들에게 조서를 내려 또 고구려 공격을 준비하였고 같은 해 7월, 양제는 회원진으로 행차하여 그대로 요동성으로 진군해올 시 고구려는 크나큰 위기를 맞을 것이 자명했습니다.

 

그동안 수나라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던 고구려였으나 고구려 역시 오랜 전쟁으로 큰 피해를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내호아가 이끄는 수나라 수군은 비사성을 함락하여 '여수 전쟁에서 최초의 성 함락'이라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삼면이 절벽으로 뒤덮인 천혜의 요새 비사성

 


기세를 이어 수나라 수군은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으로 진격하려고 했는데 고구려 측에서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면서 3차 침입 때 망명했던 곡사정을 송환하였고, 양제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8월에 회원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같은 해 10월, 양제는 하북성 강릉으로 돌아가 영양왕에게 입조(수나라 조정에 참석)를 요구했으나 영양왕은 끝내 이를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양제가 다시 고구려 공격을 준비했으나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고, 군사들을 징집하는 것도 어려움에 부딪혀 공격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면서 지독했던 여수전쟁이 완전히 종결되었습니다.

 


618년 9월, 여수전쟁을 고구려의 완벽한 승리로 이끈 영양왕이 돌아가셨고, 아쉽게도 요동성을 지휘한 성주의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

여수전쟁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영양왕(드라마 연개소문 중에서)

 

 

또한, 같은 해 양제는 강도에서 우문화급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619년, 수나라는 건국된 지 40년도 못 되어 멸망하였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백제부흥운동을 이끌던 복신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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