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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100] 조선 수군의 새로운 전진기지 고금도, 그리고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합

by 역사채우기 2022.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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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진영 고금도, 그리고 해로통행첩

명량대첩의 승리 이후 고군산도까지 진영을 옮겼던 조선 수군은 1598년 2월 17일, 다시 남해 바다로 내려와 고금도(전남 완도군 고군면에 있는 섬)에 진영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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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와 주변 지도(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기적 같은 승리 소식을 듣고 흩어졌던 군사들과 함선이 다시 모여들었고, 이순신이 계속해서 수군 재건에 박차를 가한 결과 상당수의 군수품을 확보한 데 이어 80여 척에 달하는 판옥선을 보유함으로써 명량에서 승리했음에도 전투를 지속할 여력이 부족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적의 침입에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었고, 임진년 때의 한산도처럼 이제는 고금도가 전진기지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때 이순신은 배를 이용하는 자에게 곡식 1~3섬을 받고 해로통행첩을 발행하여 바닷길을 드나들 때마다 세금을 내게 하였고, 통행첩이 없는 자는 간첩선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밀려드는 피난민 중에 섞여 있을지 모르는 적의 첩자를 식별하기 용이했으며, 시행한 지 열흘 만에 1만여 석의 곡식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해로통행첩으로 군량미를 확보한 이순신장군



현대에도 군대는 엄청난 금액의 국방예산을 지원받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자급자족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상황이 [징비록]과 [이충무공행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순신은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구리와 쇠를 모아다 대포를 주조하고 나무를 베어다 배를 만들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이때 병화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모두 이순신에게로 와서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막사를 만들고 장사를 하며 살아가니 온 섬이 이를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징비록]

 

1598년 2월 17일,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그 섬은 산이 첩첩이 들려 지세가 기이하고 그 곁에 농장이 있어서 공은 백성들을 모아 농사를 짓게 하고 군량 공급을 받았다.
그리하여 군대의 위세가 강성해져서 남도 백성들이 공을 의지해 사는 자들이 수만 호에 이르렀고 군대의 장엄함도 한산진보다 10배나 더하였다.

- [이충무공행록]

 



|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합류

이순신이 이렇게 고금도에서 다시금 한산도 통제영 시절의 위용을 갖추고 있을 무렵,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고금도에 합류하였습니다.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드라마 불멸의이순신 중에서)



[징비록]에 따르면 진린은 성격이 포악하여 고을 수령을 함부로 때리고 욕하며, 찰방 이상규의 목을 새끼줄로 매어 끌고 다니며 피투성이로 만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류성룡은 이순신이 진린과 함께 있다면 진린이 장수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고, 군사를 자기 마음대로 다룰 것이기에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류성룡의 [징비록]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이순신은 진린과 그 휘하의 5천 군사까지 배불리 먹여 환심을 샀고, 명나라 군대가 조선 백성에게 행패를 부리자 이를 핑계로 진영을 옮기려는 제스쳐를 취했고, 이에 당황한 진린이 이순신에게 명군의 지휘권까지 주었습니다.
역시 이순신


한편, 명나라 수군이 고금도에서 조선 수군에 합류했다는 보고를 받은 일본 수군, 도도 다카토라가토 요시아키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고금도 기습 공격을 시도합니다.

도도 다카토라

 

 

 

다음 시간에 절이도 해전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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