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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98] 석주관을 지키기 위한 7의사의 항쟁! 석주관전투

by 역사채우기 2022.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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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한 후 일본군은 군대를 좌군, 우군, 수군,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 전라도 진군을 감행하였습니다.

정유재란 일본군 진군로(출처 : 역사저널 그날)



이 당시, 수군은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무너뜨렸고, 우키타 히데이에가 총지휘관으로 있는 좌군구례를 거쳐 남원 방면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우키타 히데이에



이때 구례를 지키고 있던 구례현감 이원춘은 5만 6천이나 되는 적의 대군을 감당할 수 없어 남원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이로써 8월 7일, 구례함락된 데 이어 8월 15일에는 남원성함락되면서 구례현감 이원춘 역시 전사하였습니다. (남원성 전투)

 

 

남원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28

 

[임진왜란86] 남원성 전투(1) 사나이 국은을 갚을 때가 이 날이 아닌가!

| 일본군의 전라도 재침공 계획 지난 임진년(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개전 초반, 일본군이 승승장구하며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진출하였으나 결정적 승리를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29

 

[임진왜란87] 남원성전투(2) 전세의 불리함을 딛고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라!

| 남원성 전투 8월 13일, 일본 좌군은 남원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북문, 동문은 하치스카 이에마사, 서문은 고니시 유키나가, 남문은 우키다 히데이에가 담당하기로 정한 

historicalhistory.tistory.com

 

 

 

| 1차 석주관전투

전라도 일대를 휩쓴 일본군이 노략질을 행하며 백성들을 상대로는 코를 베며 잔혹하게 살해하자 왕득인이 격문을 써 하동과 구례를 잇는 석주관에서 의병을 모아 적의 만행을 저지하려 나섰습니다.

구례 석주관성(출처 : 문화재청)



9월 9일, 왕득인과 의병들은 지리산의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한편, 일본군에게 기습을 가하여 타격을 주려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왕득인 이하 의병들이 모두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석주관전투의 소식을 들은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등과 함께 다시 의병을 모아 석주관으로 향했습니다.


11월 9일, 이들은 연곡에서 일본군 60명을 죽이고 포로 200여 명을 구출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인근에 있던 화엄사에서 군량미 103석과 승병 153명을 지원해주니 왕의성과 의병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연곡에서의 패배를 되갚아주기 위해 일본군이 석주관으로 다시 쳐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화엄사 전경(출처 : 문화재청)

 

 


| 2차 석주관전투

왕의성과 의병들은 나무를 베고 바위를 쌓아 길목 요소요소를 차단한 후 일본군을 계곡으로 유인하였습니다.

승군을 지휘하는 서산대사(출처 : 한국문화정보원)

 


잠시 후, 적이 예상 경로에 진입하자 좌우에서 돌을 굴리며 전투가 시작되었고, 전력의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도 이들은 적의 공격을 잘 막아냈습니다.



이때 한호성은 일본군 수십 명을 죽이며 강을 피로 만들 정도로 분투했으며, 나머지 의병 역시 일당백의 심정으로 제 몫을 다해주고 있었으나 계속해서 밀려드는 적의 기세 속에 하나 둘 죽으며 점차 산 정상부로 밀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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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병(영화 명량 중에서)

 


결국, 이번에도 중과부적으로 병력의 열세를 견디지 못하고 석주관 함락되었고, 산의 정상에서 지휘하던 왕의성만이 혼자 살아남았을 뿐 나머지 의병과 승병들은 모두 전사하였습니다.



이후, 전투에서 살아남은 왕의성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삼전도의 굴욕) 통곡하며 돌아갔습니다.

시간이 흘러 1804년, 1차 석주관전투의 왕득인, 2차 석주관전투의 왕의성,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7의사에게 각각 관직이 내려졌고, 칠현사에 배향되었으며, 1946년에는 석주관에 칠의각과 영모정이 세워져 석주관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분들의 항쟁을 기리고 있습니다.

석주관칠의사묘(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다음 시간에 사로병진책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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