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102] 1차 울산성전투(1) 두려움에 빠진 적을 교란하라!

by 역사채우기 2022. 8. 6.
반응형

| 공격목표는 어디인가

육지에서의 직산 전투와 바다에서의 명량 대첩으로 북진이 좌절된 일본군은 더 이상의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고 귀국하려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반대로 철수할 수 없게 되자 남해안에 머물면서 왜성을 쌓고 조명연합군의 반격을 저지하려 하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때 조명연합군의 명나라 경리 양호와 도원수 권율은 여러 왜성 중 순천 왜교성고니시 유키나가울산성(도산성)의 가토 기요마사로 공격목표를 압축했고, 둘 중 어느 곳을 공격할지 논의 중이었습니다.

조명연합군은 논의 끝에 다음과 같은 이유로 울산성의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기로 하였습니다.

울산왜성 상상도(출처 : 역사스페셜)



첫째로, 울산은 일본군의 본진인 부산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울산성을 함락시킨다면 일본군의 사기를 한순간에 꺾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1군 선봉장이었으나 임진왜란 이전에는 전쟁을 반대했고, 임진왜란 발발 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는 명나라와 강화를 이끌기 위해 노력했던 고니시와는 달리 가토는 매우 호전적인 전쟁 불사론자였으며, 함경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임해군순화군, 이 두 왕자를 잡은 일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임해군과 순화군이 잡힌 과정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7

 

[임진왜란35] 국경인의 반란과 임해군, 순화군의 악행

| 가토 기요마사의 함경도 점령 7월 17일~18일의 해정창 전투에서 조선군이 궤멸당하자 더이상 자신을 막을 군대가 없다고 판단한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 제2군은 다시 빠른 속도로 진군하여 

historicalhistory.tistory.com

 

 

 

| 결전을 앞두고 심혈을 기울이는 양측

조명연합군은 울산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항왜 장수인 여여문을 잠입시켜 울산성의 구조와 병력 규모, 배치 등을 확인하게 하였고, 명나라군은 경리 양호, 제독 마귀, 파새 등의 장군이 3만에서 4만 4천에 이르는 군사를, 조선군은 도원수 권율, 경상좌병사 고언백, 경상좌수사 이운룡, 경상우병사 정기룡 등의 지휘관을 포함하여 1만에 이르는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4만에서 5만에 달하는 조명연합군은 경주에 모인 후 일본군이 울산성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울산성 일대의 길목을 차단한 후 명군 일부는 순천의 고니시를 공격했고, 경상좌수사 이운룡서생포를 공격하였습니다.

반응형

 


당시 일본군은 조명연합군의 공격 목표가 어디인지 몰랐으므로 각 왜성에 산재한 채 방어에 온 힘을 쏟고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병력을 보내 적을 교란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한편, 울산성가토 기요마사1만 6천의 군사를 보유하고 있었고, 조명연합군이 당도하기 직전에 가까스로 성의 공사를 마무리 지었지만, 인부들이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상황에서 병사들 먹일 식량과 식수까지 부족한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



1598년, 12월 23일, 조명연합군이 울산성을 완전히 포위한 후 총공세에 나섰습니다.



다음 시간에 1차 울산성 전투에 대해 이어서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