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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104] 1차 울산성전투(3) 최악의 상황에서 다가온 구원의 손길

by 역사채우기 2022.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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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토를 구하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

12월 28일, 공성전을 시작한 지 6일째 되던 날, 조명연합군은 공세를 재개하였고, 울산성 외성을 재점령하였습니다.

가토는 또다시 내성으로 몰리며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고, 내성에서도 벼랑 끝까지 몰리자 가토는 부상병들까지 동원하여 맞섰으나 이마저도 여의치않자 할복을 준비하니 조명연합군은 이제야말로 승기를 굳히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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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드디어 할복?



그런데 이때, 사방에서 가토를 구원하기 위한 지원군이 나타났고, 조명연합군은 성을 공격하는 병력을 줄이고 지원군을 상대하게 했지만, 지원군의 숫자는 계속 늘어 나베시마 나오시게,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비롯한 수많은 장수들과 그리고 가토와 철천지 원수이자 울산성과 거리도 가장 멀었던 순천 왜교성고니시 유키나가까지 병력을 이끌고 오니 그 수가 수만에 달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일전에 각 왜성에 산재해있던 일본군은 자신이 조명연합군의 목표가 될까봐 노심초사했으나 타겟이 가토울산성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울산성이 뚫리면 그다음은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으로 각기 군사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비까지 내리자 식량에 마실 물마저 부족했던 울산성의 일본군은 큰 힘을 얻었고, 반대로 조명연합군은 군사와 말들이 비를 맞으며 동사하였습니다.

조명연합군에게는 악재, 일본군에게는 호재로 다가온 비

 


상황이 이렇게 되니 조명연합군은 울산성 함락은 고사하고, 병력의 피해만 커지게 되자 해를 넘겨 1598년 1월 4일, 울산성 포위를 풀고 경주로 후퇴하였습니다.

울산성전투도



이렇게 열흘에 걸친 울산성 전투는 조명연합군이 2번이나 결정적 승리를 따내지 못한 채(첫 번째는 양호 경리의 어이없는 퇴각, 두 번째는 지원군) 소모전만 되풀이하면서 끝이 났고, 조명연합군은 목표였던 울산성 함락과 가토의 목을 취하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 전투는 패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4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명나라군 역시 1만여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나 일본군 역시 이와 비슷한 피해를 입었고, 가토는 더 이상 성을 지킬 엄두를 못 내고 서생포로 퇴각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간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의 3대 성 중 하나인 구마모토성을 축조하면서 성을 난공불락으로 만드는 것 외에도 울산성 전투 때의 뼈아픈 경험을 기억하며 성 안에 100개가 넘은 우물을 팠고, 비상식량 확보에도 힘쓰는 등 만전을 기했다고 전해집니다.

구마모토성(출처 : ko.wikipedia.org)




다음 시간에는 2차 울산성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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