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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의 역사

한국 역사상 마지막 요동정벌

by 역사채우기 2021.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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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nmUku3ne-bw

 

한국 역사상 마지막 요동정벌 #요동정벌 #공민왕 #요동성 #고려의요동정벌

한국 역사상 마지막으로 요동 지방을 정벌해 점령한 역사적인 순간에 대한 영상입니다 좋아요와 구독은 영상을 만드는데 큰 힘이 됩니다 본 음성은 인공지능 성우 서비스 타입캐스트에서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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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요동정벌을 설명해드리기 전에 당시 시대적 상황을 먼저 알려드리겠습니다.

 

 

| 거란족의 반란

12세기 초, 몽골의 칭기즈칸이 부족을 통합하고 창끝을 금나라에 돌리자 요나라 멸망 후 금나라에서 하층민으로 살아가던 거란족이 기회를 노려 반란을 일으킵니다.

 

 

거란족을 이끌던 야율유가는 동요(東遼)를 세웠고, 칭기즈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금나라 공격에 앞장섰으나 몽골에 복속되기 싫었던 야율시불이 야율유가를 몰아내고 대요수국을 세우게 됩니다.


이에 몽골군은 야율유가와 함께 대요수국을 공격하였고, 대요수국은 고려와의 국경인 압록강까지 밀리게 됩니다.

 


그러자 대요수국의 거란 유민들은 고려의 영내로 들어와 노략질을 일삼았고, 고려군은 당시 집권자였던 최충헌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예병을 보내지 않아 고전했으나 조충의 활약으로 거란 유민들을 점차 밀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최충헌(드라마 무신 중에서) 때문에 일이 커졌다

 

 

 

| 고려와 몽골의 접촉

거란 유민들은 강동성에서 농성하였고, 고려군은 쉽사리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는데 사전에 연락도 없이 몽골군이 고려의 영내로 들어왔습니다.


고려군은 결국 고려 조정의 뜻에 따라 몽골과 연합하여 성을 함락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몽골이 강동성 전투의 대가로 공물을 무리하게 요구해왔고


1225년, 고려에서 귀국하던 몽골 사신 저고여가 국경 부근에서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저고여(드라마 무신 중에서)는 몽골의 침입의 시발점이 되었다

 


몽골은 이 사건을 구실로 고려를 침입하였고 1231년부터 1259년까지 6차례에 걸쳐 지속되는 동안 고려는 관군과 농민, 노비, 심지어는 산적까지도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고려 24대 왕이었던 원종이 태자 신분으로 있을 때 몽골에 입조하여 쿠빌라이 칸(칭기즈칸의 손자)을 알현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고, 고려는 고려 고유의 정체성은 유지하는 대신 원나라(몽골)의 부마국이 되어 약 100년간 원 간섭기로 이어지게 됩니다.

 

 

 

| 공민왕의 반원 자주정책

시간이 흘러 14세기 중반, 강릉대군은 원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하며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 소식을 듣고
원나라가 점점 쇠퇴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100년 가까이 고려 사회에 깊숙히 자리 잡은 원나라 세력과 그를 떠받치는 권문세족(일제강점기의 친일파와 행적이 비슷함)의 간섭을 뿌리치고 새로운 고려를 만드려는 이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351년 고려 조정의 요청을 받아들인 원나라에 의해 충정왕이 폐위되면서 강릉대군이 고려의 31대 왕(공민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반원 자주정책을 실시한 공민왕

 


공민왕은 왕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 간섭기 시절의 왕처럼 앞에 '충'자를 붙이지 않았고, 원나라에서 볼모로 살던 시절 품었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합니다.


우선, 공민왕은 변발과 호복 같은 몽골식 풍습을 금지해 백성들의 생활에서 몽골의 자취를 감추려 했고, 원나라의 연호를 폐지하는 동시에 내정간섭을 일삼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철폐하였습니다.


그다음에는 몽골에 빌붙어 백성들을 착취하고 전횡을 일삼는 권문세족으로 칼끝을 겨누었습니다.


이 당시 권문세족은 백성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강과 산을 경계로 땅을 나눌 정도로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에 비례할 정도의 노비도 있었지만 원나라와 관계가 맺어져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 세력이었습니다.


그중에는 고려에서 공녀로 원나라에 바쳐졌다가 황후의 위치까지 오른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이 중심에 있었고, 1356년, 공민왕은 기철을 비롯한 권문세족들을 연회에 초대한 뒤 들어오자마자 매복해있던 병사들로
죽이게 하였습니다.

권문세족의 수장 기철(드라마 신의 중에서)

 


이렇게 권문세족의 수장과 그 세력을 일망타진시키니 공민왕은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작업은 영토 확장이었습니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북진정책을 추진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을 되찾고자 했고, 서희의 강동 6주 획득과 윤관의 여진 정벌로 잠시나마 개척된 동북 9성이 그 결과물이었습니다.

 

서희의 강동 6주 획득윤관의 여진 정벌(고려의 2차 여진정벌)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4

 

거란의 1차 침입과 서희의 외교담판

https://youtu.be/IwuBxmN-Ktk 이번 시간에는 거란의 고려 1차 침입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926년에 발해가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한 후 고려로 망명해오는 유민들에게 왕건(고려의 태조) 후하게 대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8

 

고려의 2차 여진정벌

https://youtu.be/q4SM7BqGXJM 고려의 2차 여진정벌 #척준경 #사묘아리 #윤관 #별무반 #동북9성 고려는 과연 17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본 음성은 인공지능 성우 서

historicalhistory.tistory.com

 


하지만 대몽항쟁 시기와 원 간섭기에 고려인이 배신하여 몽골(원나라)에 땅을 바치면서 영토가 오히려 축소되었고, 공민왕 시기 이전에 동녕부는 돌려받았으나 쌍성총관부는 아직 원나라에 속해있었습니다.


1356년, 공민왕은 유인우를 동북 병마사에 임명한 후 대호군 공부보, 종부령 김원봉, 강릉도 존무사 이인임 등을 보내 쌍성총관부 탈환을 지시하였습니다.


쌍성총관부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이자춘과 그의 아들인 이성계가 고려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면서 약 100년 만에 수복하게 됩니다.

쌍성총관부(출처 : commos.wikimedia.org)

 


공민왕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고려의 숙원이던 요동 정벌을 준비합니다.


1357년, 공민왕은 인당에게 군사를 주어 압록강 너머에 있는 파사부를 공격하였고 3개의 역참을 점령하며 요동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원명 교체기로 명나라의 힘이 날이 갈수록 강력해져 세력을 넓혀오자 공민왕은 국제정세를 살피며 잠시 주춤하게 됩니다.



한편, 기황후는 자신의 가족이 죽었다는 소식에 분노했고 원나라에 체류 중이던 친원파였던 최유를 고려에 보내 공민왕을 폐위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조국을 배신한 기황후의 초상화

 


1364년 1월, 최유는 요동의 1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략하였으나 최영이성계가 침입을 물리쳤고, 홍건적의 난, 장사성의 난과 같은 내부적인 문제로 몸살을 앓던 원나라는 외부의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공민왕의 왕위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 요동 정벌

시간이 흐르면서 원나라는 갈수록 세력이 약화되어갔고, 명나라는 내부의 반란을 잠재우느라 정신없던 이때 두 나라 모두 요동 지방에 집중할 여력은 없었습니다.

요동은 비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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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를 요동 정벌의 적기로 본 고려는 1370년 1월, 이성계가 1만 5천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함흥, 강계, 압록강을 거쳐 고구려의 첫수도 졸본성으로 추정되는 오녀산성을 공격합니다.

오녀산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사진

 


이 전투에서 이성계가 편전 70여 발을 쏘았는데 쏘는 족족 적군을 명중시키자 성 안의 군사들이 기세가 꺾여 우두머리인 고안위는 도주해버렸고, 우라산성과 주변 여러 성까지 항복해옵니다.


1370년 10월, 공민왕은 기철의 아들인 기사인테무르가 웅거하고 있는 요동성 공격을 지시하였고 시중 이인임, 서북면도원수 지용수, 동북면원수 이성계가 출정합니다.

원명교체기를 틈탄 요동성 공격

 


고려군이 요동성을 점령해야 하는 이유는 권문세족을 뿌리 뽑기 위해서라는 이유 외에도 요동 지방을 대표하는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고구려발해에 이어 발해부흥운동까지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많은 나라와 맞부딪혔던 현장으로 조상들의 혼이 잠들어있는 민족의 성지였기 때문에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반드시
이 성을 점령해야 했습니다.

 


고려군은 3일에 걸쳐 압록강을 건넜고, 비바람을 뚫으며 진군하였는데 요동성 동쪽 200리 지점에 도착한 후 비장 홍인계와 최공초에게 3천의 기병을 주어 앞서서 전진하게 하였습니다.


기사인테무르는 앞서 도착한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왔으나 고려군 본대가 도착하자 패주하였습니다.


이때 고려군은 원나라 장수 처명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거절하자 이성계가 활을 쏘아 처명의 투구를 맞췄고, 2번째 항복 권유마저 거절하자 허벅다리를 맞추었습니다.


이에 3번째로 항복을 권유하자 처명이 항복하여 이성계에게 충성을 맹세하였고, 사기가 오른 고려군은 공성전을 전개합니다. 

 

동국통감에는 요동성 전투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은 매우 높고 험준하며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지고, 나무와 돌도 쏟아져 내렸으나 우리 보병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성에 다가가 급히 공격하여 드디어 함락시켰다.

 

 

마침내 1370년 11월 4일, 고려군은 고구려 요동방어선의 핵심으로 고수전쟁 당시 제1차 세계대전 이전 가장 많은 군대를 막아냈던 요동성을 점령하며 요동 정벌을 성공적으로 완수합니다.


이는 1116년에 발해 유민 고영창이 요동성(당시 요나라의 동경요양부)을 점령하며 대발해국을 세운 이후
약 25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대발해국을 세운 일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

 

발해의 또다른 시작! 발해부흥운동

https://youtu.be/uU7UHdDmivM 이번 시간에는 발해 멸망 후 이어진 발해부흥운동(후발해, 정안국, 흥요국, 대발해국)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 후발해의 역사 925년 요나라(거란족)의 침입으로 926년에 발해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이후 공민왕은 이곳의 백성들에게 "요심은 원래 우리나라 땅으로, 대군이 또 출정하면 선량한 사람까지 피해를 볼까 우려된다. 
그러니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관청에서 양식과 종자를 주어 저마다 생업에 안착하게 해 주겠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 눈물을 머금고 철군하는 고려군

이렇게 영토 확장과 더불어 점령한 지역의 민심까지 확보하였으나 문제는 보급이었습니다.


1달 동안의 여정에 이르는 동안 가져온 군량은 떨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요동성은 점령하였으나 전투 도중 군량 창고에 불이 붙는 바람에 군량이 매우 부족해졌고, 고려 본국에서도 보급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아무리 사기가 높고 강한 군대라도 굶고는 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애써 점령했던 지역에서 철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죽은 병사가 전투를 치르며 죽은 병사보다 많았을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 : 군대는 먹어야 움직인다.

전쟁에서의 보급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이 결과, 고려는 한국 역사상 마지막으로 잠시나마 요동을 수복하며 북진정책을 추진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 했습니다.


이후에도 요동 정벌은 2차례 더 추진되었으나 2차 요동 정벌은 1388년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키며 실패하였습니다.

 

3차 요동 정벌은 조선왕조가 들어선 후 1398년에 이성계와 정도전이 추진하였으나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면서 역시 실패하고 맙니다.

 

 


다음 시간에는 좌원대첩살수대첩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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