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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의 역사

최무선, 화약의 개발로 위기에 처한 고려를 구하다!

by 역사채우기 2021.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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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oNcYHptkes

 

 

| 고려 말 왜구의 발호

최무선이 활동할 당시, 북쪽에서는 홍건적(백련교도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한족 농민 반란군)이 쳐들어왔고, 남쪽에서는 왜구가 고려의 해안을 침범하여 노략질하면서 극심한 피해를 주었습니다.

고려 말 왜구와 홍건적의 발호(출처 : dh.aks.ac.kr)

특히 왜구는 1223년 처음 고려를 침입하여 이후 5년에 걸쳐 7차례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지역에서 노략질을 저지르기 시작했고 당시에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1350년부터 왜구의 침입 횟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하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우왕(고려 32대 왕) 시기에는 278회나 침입하면서 고려의 존속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왜구의 침략 원인은 일본의 남북조시대 당시 전쟁이 지속되면서 자신들의 생활환경이 피폐해지자, 가까운 나라인 고려로 쳐들어가 노략질을 자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최무선 역시 외적의 침입을 막는데 상당한 관심이 있었고, “왜구를 막는 데는 화약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되뇌이며 화약에 특히 관심을 보였습니다.

흑색화약 사진

화약은 중국에서 일찌감치 개발되어 다양하게 쓰이고 있었으나 화약 제조법을 기밀에 부쳤기에 고려는 중국에서의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렇게 수입한 화약도 불꽃놀이 할 때나 쓰일 정도였습니다.


| 화약과 화포의 개발

최무선화약을 제조하기 위해 다각도로 실험하였고, 원나라의 강남 지방에서 온 염초장 이원의 도움을 받아 화약 제조에 성공했습니다.


마침내 최무선은 도평의사사(국방·군사의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에 자신이 만든 화약을 시험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해당 관리들은 최무선의 말을 믿지 않고 사기꾼으로 매도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1377년 10월, 도평의사사의 주관하에 화약의 시험에 성공하여 화통도감(화약 및 화기 제조를 담당하던 관청)이 설치되었습니다.

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 민족기록화


최무선화통도감에서 근무하며 자신이 개발한 화약과 이를 뒷받침해줄 무기인 대장군포 · 이장군포 · 석포  · 화포 · 화통 등의 총포류와 화전 · 철령전 · 피령전 등의 발사용 화기를 제조하였습니다.
또한,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는 왜구의 특성을 고려하여 해전을 치르기 위해 선체에 함포를 실을 수 있도록 개량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대장군포 사진


이렇게 최무선왜구의 침입을 격퇴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그간의 노력이 결실을 볼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380년, 왜구가 5백여 척이나 되는 전함을 이끌고 진포(전북 군산 또는 충남 서천군으로 추정됨)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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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포대첩

진포에 침입한 왜구는 서천과 금강 어구에 올라와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주변 지역에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당시 상황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고, 약탈한 쌀을 배로 옮기다 흘린 것이
한 자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원수로 임명된 최무선은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와 함께 전함 100척에 화통과 화포를 탑재한 뒤, 왜구를 섬멸하기 위해 출정하였습니다.
왜구의 전함은 큰 밧줄로 서로 묶어둔 상태로 정박해있었기 때문에 화포로 타격을 입히기 좋은 상태에 있었으며, 그 틈을 노려 고려 수군은 화전, 화통, 화포 등을 발사하였습니다.
그러자 왜구의 전함은 순식간에 불이 번져버려 배에 타고 있던 왜구들은 대부분 불에 타 죽었으며, 살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왜구도 있었으나 고려군의 화살을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고려군의 화포와 불화살을 맞고 불타는 왜구의 배 


이렇게 500여 척이나 되는 왜구의 전함은 모두 불에 타거나 가라앉아 버렸고, 고려군은 1/5의 전력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 진포대첩의 여파

하지만 진포대첩에서 살아남은 왜구들은 전라도와 경상도 내륙을 돌아다니며 또다시 노략질을 자행하였으나 병마도원수 이성계황산(전북 남원 지리산 부근)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70여 명을 제외한 왜구들이 모조리 섬멸되었고(황산대첩), 이를 계기로 왜구의 침입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황산대첩비 탁본(출처 : ko.wikipedia.org)

그리고 진포대첩한민족 최초의 함포 해전이었으며, 이때 사용된 전함과 화포가 바탕이 되어 전력이 한층 강화된 고려군은 이후 왜구가 침입했을 때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일설에는 진포대첩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 이때 사용된 화기와 전함이 개발을 거듭한 끝에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는데도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최무선의 업적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최무선의 화약 개발은 이순신 장군에게도 영향을 끼쳤다(이미지는 한산도대첩)

 

 

다음 시간에는 조선의 대량살상무기 화차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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