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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려의 역사

세계 최강 몽골군의 총사령관을 쓰러트린 김윤후 장군

by 역사채우기 2021.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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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sHw-O_e6dA

이번 시간에는 대몽항쟁 시기 몽골군에 맞서 2차례 큰 승리를 거두고,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이까지 전사시킨 김윤후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 몽골의 침입

1231년,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사건(누가 죽였는지는 알 수 없음)을 구실로 몽골은 살리타이를 보내 고려를 침략하였고, 고려는 이에 맞서 귀주성과 동선역 등지에서 승리하였으나 대집성이 이끄는 고려의 중앙군이 안북성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수도인 개경이 위협에 처하자 당시 고려의 왕이었던 고종(고려 23대 왕)은 몽골과 강화를 맺어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였습니다.

 

귀주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8

 

12명의 결사대로 몽골군에 2번 승리한 김경손 장군

이번 시간에는 몽골의 침입 때 귀주성 전투와 이연년 형제의 난을 진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김경손 장군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https://youtu.be/JYMtOOW9d-U | 몽골의 침입 1225년 1월, 몽골 사

historicalhistory.tistory.com

 

하지만 당시 무신집권자였던 최우(최씨정권 4대 집권기 중 2번째로 집권한 인물)는 몽골군이 재차 침입해올 것으로 예상하였고, 몽골군이 유목민족이기 때문에 해전에 약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강화도로 천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같은 고려의 행동에 분노한 몽골은 1232년, 다시 살리타이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고려를 침입하였습니다.
이른바 몽골의 2차 침입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몽골군은 고려의 매국노 홍복원을 앞세워 고려의 3경인 서경(평양), 개경(개성), 남경(서울)을 차례로 함락시켰습니다.
이후 몽골군해전에 익숙지 못하여 고려 조정이 있는 강화도를 공격하지는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종용하였으나 고려는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고려 국토 전체를 초토화시켜 왕이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남하하여 광주성(경기도 광주)을 공격했으나 광주목사 이세화에게 패하여 다다른 곳이 바로 처인성(용인)이었습니다.

 

| 처인성 전투

처인성은 둘레가 약 400m인 작은 토성이었고, 그곳은 고려의 특수행정구역(향ㆍ소ㆍ부곡) 중 하나인 처인부곡으로 천민이나 일반 군현에 속한 주민들에 비해 세금 부담이 크고, 과거 진출에 제한이 있는 양인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었으며, 주변 고을에서 피난 온 군민과 김윤후를 필두로 한 승병들이 힘을 합해 지키고 있었습니다.

처인성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몽골군은 처인성 공격에 앞서 처인성 동북쪽에 위치한 완장리, 매룡리를 점령하여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고, 김윤후는 처인성의 주요 요충지에 군대를 매복하여 곧 있을 전투에 대비하였습니다.

마침내 1232년 12월 16일, 살리타이의 몽골군은 처인성을 공격하였으나 군민과 승병의 격렬한 저항에 막혀
함락에 실패하였고, 살리타이는 다음 전투를 위해 처인성을 정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처인성 동문 밖 언덕에 매복해있던 고려군이 몽골군을 기습하였고, 살리타이가 김윤후가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그러자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은 사기가 매우 저하되었고, 반대로 사기가 오를대로 오른 처인성의 군민들이 성문을 열고 나와 공격을 가하자 몽골군이 큰 피해를 당하고 퇴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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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 전투 민족기록화


이 일을 계기로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이 힘들어진 몽골군은 고려와 강화를 맺고 급히 철군하면서 몽골의 2차 침입이 종료되었습니다.
이후 고려 조정에서는 김윤후를 상장군으로 임명하였으나 끝까지 사양하자 섭랑장으로 바꿔 임명하였으며,
처인부곡 또한 처인성 군민의 공을 인정하여 처인현으로 승격하였습니다.

 


| 충주성 전투

시간이 흘러 1253년, 이때까지도 고려와 몽골은 전쟁 중이었고(몽골의 5차 침입), 당시 김윤후는 충주산성방호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예구가 이끄는 몽골군이 부장 아모간과 고려의 매국노 홍복원, 이현 등을 이끌고 충주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전투는 70일 가까이 공방전을 지속하였습니다.

김윤후(드라마 무신 중에서)

이에 따라 비축해둔 식량이 부족해지고, 군사들의 사기마저 떨어지게 되자 김윤후는 성의 주민들을 모아놓고

 "누구든지 힘을 다해 싸우면 귀천을 불문하고 벼슬을 주겠다" 하면서 성 안에 보관되어 있던 노비문서를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몽골군에게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에 충주성의 주민들은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져 몽골군에 더욱더 거세게 저항하니 몽골군은 기세가 꺾여 더는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충주성 전투의 승리로 전황이 불리해진 몽골군은 더 남하하지 못했고, 고려와 또다시 강화를 맺어 철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김윤후는 감문위 상장군으로 임명되었고, 전투의 공에 따라 관노와 백정까지 모두 벼슬을 받았으며,
충주 역시 국원경으로 승격되었습니다.
2개의 도시를 승격시킨 김윤후

 

이렇게 몽골군의 총사령관을 사살하고, 몽골군과의 2차례 전투에서 승리하여 철군하게 한 김윤후는 1263년에 수사공우복야 벼슬을 지낸 이후 안타깝게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끈 광개토태왕의 일대기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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