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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제1차 고당전쟁

제1차 고당전쟁 3편_주필산 전투

by 역사채우기 2021.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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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E0l21CW4UvA

이번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안시성 전투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 신성ㆍ건안성 전투

파죽지세로 고구려가 자랑하는 요동의 주요 성들을 함락시킨 당군은 개전 초기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한 북쪽의 신성과 남쪽의 건안성을 재차 공격하였습니다.

신성과 건안성의 위치


후일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4대 전투(신성, 건안성, 주필산, 금산전투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안시성 전투는 ?)에 건안성 전투신성 전투를 꼽을 정도로 전투는 매우 치열했고, 당시 개모성에 주둔했던 당나라 장군 위정은 연일 들려오는 함성과 북소리에 두려움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군은 신성건안성에서 고구려의 거센 반격에 밀리자 목표를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당나라 장군 이세적은 배후의 위협을 우려해 안시성 공격을 주장했고, 당 태종 이세민은 안시성이 연개소문의 정변 때 연개소문의 의견에 따르지 않아 공격을 받았음에도 끝내 지켜냈다는 점을 들며 우회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안시성 공격을 주장한 요동도행군 대총관 이세적(이적)

 

| 주필산 전투

하지만 당군의 행선지는 결국 안시성으로 정해졌고 645년 6월 20일, 안시성 부근에 도달합니다.
이에 고구려는 말갈과의 연합군으로 구성된 15만 대군을 안시성으로 급파하면서 양측의 수십만 군대가
대치하게 됩니다.


이때 당 태종은 여러 장수들에게 고구려의 대군이 안시성과 연계하여 지구전을 펼치는 것이 상책이며,
안시성의 군사와 함께 도망치는 것이 중책, 당군과 전면전을 펼치는 것이 하책이지만 고구려는 필시
하책을 펼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당 태종 이세민

  
한편, 고구려의 진영에서도 논의가 오갔는데 대대로(고구려의 제1관등) 고정의당 태종상책이라며
말했던 내용 그대로 지구전을 펼치며 당군이 군량이 떨어질 때를 노려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은 위의 주장에 반대하며 당 태종하책이라고 말했던 전면전을 펼칠 것을 주장하였고,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안시성 밖 40리까지 진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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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진영의 형세를 살피던 당 태종은 40리나 이어진 고구려군의 규모를 보고는 크게 두려워했으나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항복한 돌궐 출신 장군 아사나사이에게 1천의 기병을 이끌고 고구려군을 유인하게
하였습니다.
이후 아사나사이의 군사를 가볍게 제압한 고연수고혜진의 고구려군은 여세를 몰아 앞다투어 진격하여 안시성 동남방 8리까지 진격하였습니다.

아사나사이의 군대를 격파하고 진군하는 고연수와 고혜진(영화 안시성 중에서)


유인에 성공한 당 태종은 고구려군을 더욱 방심시키기 위해 고구려 진영에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나는 너희 나라의 권력 있는 신하(연개소문)가 임금(영류왕)을 시해한 죄를 물으러 온 것이고, 마초와 양식이 부족하여 성을 빼앗았으나 그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절을 지킨다면 잃었던 성은 다시 돌려줄 것이다."

 

고연수고혜진은 이 말을 믿고 방비를 소홀히 했고, 마침내 6월 22일, 당군은 이세적(요동도행군 총관)과 장손무기(당 태종의 처남이자 재상), 당 태종을 중심으로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진을 쳤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고구려군은 이세적의 군대가 홀로 포진한 것으로 오인하여 이세적의 진영으로 돌격을 감행하자 이세적의 진영이 금세 포위되었고, 당 태종의 친위대까지도 말갈 기병에게 공격받아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고구려 개마무사(영화 안시성 중에서)

고구려로서는 이대로라면 살수대첩 때와 같은 엄청난 승리를 거둘 수도 있었고, 당군은 크게 밀리고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버티면서 장손무기의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장손무기의 군대가 고구려군의 후방을 급습하였고 이에 때맞추어 당나라의 모든 군사가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니 전세는 역전되었고, 고구려군은 세 방향에서 밀려드는 당군에 맞섰으나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전투 도중 천둥 번개가 내리쳤고, 그 틈을 이용해 기이한 복장으로 고함을 치며 고구려의 진영을 파고든 병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설인귀입니다.
또한, 신라 출신으로 당군의 선봉에 서서 전투를 벌이던 설계두는 전사합니다.
이에 당 태종설인귀를 유격장군으로 임명하였고, 설계두는 대장군으로 추증하여 공을 치하합니다.

주필산 전투에서 활약한 설인귀(드라마 대조영 중에서)


한편, 고구려군은 주필산 전투에서 2만의 군사를 잃고 당군의 포위망을 겨우 빠져나온 뒤 고정의의 본대와 합류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인근의 산에 들어가 방어태세를 갖추게 됩니다.

    
이 광경을 보고 당군은 산을 포위하여 고구려군을 고립시켰고, 견디다 못한 고연수와 고혜진은 남은 군사 3만6천8백 명을 이끌고 항복하였습니다.
이에 당 태종고연수를 홍려경으로, 고혜진을 사농경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거대한 구덩이를 파서 항복한 군사 중 말갈군 3천3백 명을 황제의 진영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을 들어 생매장했습니다.

 

안시성에서 멀리서나마 이 광경을 지켜볼 고구려인들에게 자신에게 대항한다면 이와 같은 꼴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당 태종의 강력한 경고였을 겁니다.

주필산에서 고구려의 구원군 일부를 크게 물리친 당군은 전열을 정비한 후 8월 10일, 안시성 공격을 감행합니다.

 

신성건안성이 아직 버티고는 있지만 안시성까지 무너진다면 고구려로서는 요동의 대부분을 잃고 고구려 내지까지 전선이 이어질 수 있는 고구려로서는 점점 최악의 상황에 치닫고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제1차 고당전쟁 4편_안시성 전투로 이어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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