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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제1차 고당전쟁

제1차 고당전쟁 5편_당 태종을 추격하는 연개소문

by 역사채우기 2021.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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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8r0LRIBgOc

이번 시간에는 안시성 전투 이후 연개소문이 도망가는 당 태종 이세민을 추격하는 이야기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에 앞서 제1차 고당전쟁의 과정에 대해 간략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 당나라의 침입

때는 645년, 당 태종 이세민연개소문의 정변(영류왕과 대신 100여 명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한 사건)을
응징한다는 구실로 고구려를 침공하였습니다.
당나라 군대는 전쟁 초기에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 비사성 등을 함락시키고, 주필산 전투까지 승리하면서 기세를 올렸지만 건안성신성, 그리고 안시성에서 군민들의 저항에 가로막혀 발이 묶이게 되었습니다.

안시성과 신성, 건안성은 당군의 연이은 공격을 모두 막아냈습니다

당 태종은 안시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60일 동안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토산까지 쌓았으나 고구려군에 점령당했고, 연개소문이 보낸 사신의 요청으로 설연타가 당나라를 공격했다는 급보가 전해졌습니다.

설연타의 공격은 당나라에게 큰 타격이었습니다.


게다가 안시성에서 약 3개월간 공방전을 지속하는 동안 식량은 줄어만 갔고, 날짜는 어느덧 음력 9월로, 요동 지방에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 연개소문의 기습

그런데 이때 당나라에 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연개소문이 이끄는 3만의 고구려군이 만리장성을 넘어 상곡(지금의 하간시) 지방을 습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 하간시의 지도



전쟁 직전, 연개소문은 장수들에게 당군이 요동의 성들을 공격하면 성문을 열고 나가 직접 싸우지 말고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빈틈이 보일 때 성문을 열고 공격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연개소문이 직접 당나라의 후방을 기습하여 당군의 보급을 끊은 뒤 퇴각하는 당군을 앞뒤로 공격하여 당 태종 이세민을 사로잡는다는 작전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봉화는 순식간에 피어올라 안시성에서도 연개소문이 작전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안시성주와 오골성주 추정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성문을 열어 전군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당나라 군대는 갑작스런 고구려군의 기습에 크게 당황하여 사람과 말이 서로 짓밟으며 도망쳤고, 당 태종 역시 말이 수렁에 빠지면서 꼼짝 못하게 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때 안시성주가 쏜 화살이 당 태종의 왼쪽 눈을 맞춰 자칫하면 황제를 사로잡을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당나라의 유격장군 설인귀가 나타나 당 태종의 말을 갈아 태워 황제를 구하고, 당나라의 선봉 유홍기
추격해오는 고구려군을 죽을 각오로 막아준 덕분에 당 태종은 가까스로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설인귀연개소문에 맞서 당 태종을 구하는 장면은 현재까지도 중국 경극에서 자주 쓰이는 소재입니다.

비도술을 사용하는 연개소문(하단 오른쪽)과 당 태종(상단 오른쪽)을 구하는 설인귀(하단 왼쪽)

 

| 당 태종의 퇴각

이렇게 당 태종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이제는 본국으로 어떻게 돌아가야 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이때 당 태종이 선택할 수 있는 퇴각로는 총 3곳이었지만, 2곳은 이미 고구려군이 주둔해있거나 기습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퇴각로는 사실상 한 곳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요택! 요하 하구의 늪지대였습니다.

요택이 늪지대긴 해도 고구려를 침공할 때 요하를 건너면서 사용했던 도하 장비가 있었다면 한결 건너기 수월했겠지만, 당 태종이 요하를 건넌 직후 고구려와의 결전을 다짐하면서 배수진을 치는 심정으로 도하 장비를 모두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당나라에 더 큰 악재가 되었습니다.

도하장비를 태우고 배수진을 치는 심정으로 진군했으나 퇴각할 때는 발목을 잡았습니다.


거기다 요택을 건너는 200리 길에는 수나라 병사들의 해골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수십 년 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해 시신도 거두지 못한 채 묻혀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당 태종이 황제의 신분임에도 흙으로 길을 메우는 것을 돕고, 수레를 밀어야 할 정도로 상황은 매우 열악했으며,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죽는 말이 열에 7~8마리일 정도로 큰 피해를 보아야 했습니다.

일전에 당 태종 본인은 출정할 때 수 양제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전쟁을 치밀하게 준비했다고 자부했지만 어느새 본인도 수 양제와 같은 꼴을 하고 있었고, 병사들 역시 수나라 병사들과 운명을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 공격을 실패하고 퇴각할 때의 모습은 수 양제나 당 태종이나...


그래도 당나라 군대는 이 죽음의 땅 요택만 지나가면 본국으로 어떻게든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희망을 품고 힘을 쥐어짜내 행군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 고구려의 반격

당 태종요택을 지나면서 "누가 연개소문더러 병법을 안다고 했느냐? 병법을 안다면 어찌 이 요택을 지키지 않는단 말이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순간 함성이 들리더니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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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황제 이세민은 내 칼을 받아라!" 

연개소문이 당도한 것이었습니다.

앞에는 연개소문, 뒤에는 안시성주와 오골성주 추정국의 군대가 뒤를 바짝 추격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군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당나라 군대는 학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도망치기 바빴고, 당 태종 역시 도망치는 방법 외에는 방도가 없었습니다.


당 태종은 간신히 추격을 뿌리쳤지만, 주변에 군사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계속 도망을 치는 신세였습니다.

 

어느 날, 당 태종은 고구려군의 감시를 피해 도망치기 위해 고구려군 진영을 염탐하다 연개소문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세민아! 어딜 그리 급히 가느냐! 황제가 어찌 감히 뒤를 보인단 말이냐!"
연개소문이 칼을 휘두르며 쫓아오자 급한 나머지 당 태종은 재빠르게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겼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개소문이 그 우물이 있는 곳으로 왔으나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우물을 들여다보니 우물 안은 거미줄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습니다.

연개소문은 설마 이런 곳에 사람이 있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며 돌아갔고, 이렇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 당 태종은, 수도 장안으로 돌아가 날이 어둡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거미줄 덕분에 목숨을 보전한 것에 착안하여 탑을 쌓고 이름을 몽롱탑이라고 지었습니다.

몽롱탑 사진

 

현재에도 강소성 염성시에는 몽롱탑이 있으며, 지역 주민들도 이 탑은 당 태종이 연개소문의 추격을 피해 숨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세웠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연개소문이 당 태종을 잡기위해 당나라 내지 깊숙히 들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북경성 안정문 부근에 있는 고려진과 하간현 부근에 위치한 고려성연개소문당 태종 이세민을 잡기 위해 당나라를 정벌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북경 부근의 고려성(고려진) 지도(출처 : ko.wikipedia.org)


마지막으로 이 과정이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당 태종이 황제로서는 절대 봐서는 안 될 실록을 직접 본 후 손을 대면서 자신의 과오를 감추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당 태종 : 고구려 원정 실패도 치욕인데 강소성까지 도망갔다는 건 더더욱 기록할 순 없지

 

 

다음 시간에는 대몽항쟁 시기 몽골의 총사령관 살리타를 전사시키고 고려를 구한 김윤후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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