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제1차 고당전쟁

제1차 고당전쟁 1편_전운이 감도는 요동벌판

by 역사채우기 2021. 9. 15.
반응형

https://youtu.be/kj-wqSZMTAc

 

이번 시간에는 중국 역사상 명군 중에 명군으로 손꼽히는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침략한 제1차 고당전쟁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수나라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중국을 통일했으나 고구려 원정 실패와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고, 618년 6월, 수나라 3대 황제인 양유가 당국공 이연(이후 당나라 1대 황제로 즉위)에게 선양하면서 건국된 지 불과 38년 만에 멸망하였습니다.


한편, 고구려는 수나라의 거듭된 침입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영양왕이 죽고, 영류왕이 27대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영류왕은 수나라의 2차 침입 때 평양성 전투에서 500명의 결사대로 내호아가 이끄는 수나라 수군 4만 명을 격퇴함으로써 을지문덕살수대첩과 더불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습니다.

 

영류왕의 고수전쟁 활약상과 살수대첩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21

 

한국 최고의 전투 2편(살수대첩)

https://youtu.be/TFNTEjn-mBY 이번 시간에는 한국사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알려진 살수대첩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 수나라의 통일 581년에 건국된 수나라는 589년에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나라

historicalhistory.tistory.com

 

그는 전쟁을 몸소 체험하면서 피해를 복구하고, 국력을 추스를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에 새로 떠오르는 당나라에 강경책 대신 안정책을 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나라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냈고, 622년에는 고수전쟁 당시 발생한 포로를 교환하며 양국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 팽창하는 당나라와 무기력한 고구려

그러나 626년 당나라에서 당 고조 이연의 차남 이세민이 두 형제(이건성, 이원길)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하는 '현무문의 변'이 일어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당 태종 이세민


당나라의 2대 황제로 즉위한 당 태종 이세민은 이전의 수 양제(수나라 2대 황제)처럼 야심이 가득한 인물이었고, 주변국, 특히 고구려를 정복하려는 야욕을 품고 있었습니다.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위한 사전 작업을 하나하나 실시해나가는데 그 중 첫 번째로 630년에 동돌궐을 멸망시켰습니다.

동돌궐서돌궐과 분열된 상태였음에도 수ㆍ당 교체기의 여러 군웅에게 조공을 받을 정도로 국력이 매우 강했고, 그 중에는 당 태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커다란 장애물이 제거되자 당나라는 자신감을 얻은 반면, 고구려돌궐과 친선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영류왕은 위기감을 느끼고 당나라에 승전을 축하하는 사신을 보냄과 동시에 봉역도(고구려의 지리 정보가 담긴 지도)를 바치는 저자세 외교를 진행합니다.
또한, 631년에는 영류왕이 당나라 사신 장손사가 고수전쟁의 전승기념탑인 경관을 헐어버리는 일을 승인합니다.

경관 허무는 장면(드라마 연개소문 중에서)



경관은 고구려에 있어서 고수전쟁 승리의 상징과도 같았고, 전쟁이 끝난 지 20년도 안 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참전용사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632년, 영류왕은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부여성에서 비사성에 이르는 천리장성 축조를 지시합니다.

 

이 시기 당나라는 638년 토번서돌궐을 제압하고, 640년에는 고창국을 멸망시키면서 고구려 정벌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세력을 하나하나 정리해나갔습니다.

고구려 주변 국가를 하나하나 지워나가면서 고구려를 압박하는 당나라



반면, 고구려는 640년에 태자를 당나라에 입조시키면서 무력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는 고구려의 통제 하에 있는 거란말갈 등의 이탈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고구려의 군부는 들끓고 있었습니다.
거란, 말갈 : 고구려가 당나라의 꼭두각시가 되다니 차라리 당나라에 붙는게 낫겠어

 

| 연개소문의 정변과 고당전쟁

642년 10월, 영류왕연개소문에게 천리장성 축조를 감독하는 일을 지시하여 파견 보내면서 조정 대신들과는 동부대인이 되어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 연개소문의 암살을 모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그 사실을 알아채고 대신들에게 자신이 주최하는 군대 사열식에 참여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는 사열식에 참여한 대신 100여 명을 죽이고 궁궐로 쳐들어가 영류왕까지 시해합니다.

영류왕을 시해하는 연개소문(드라마 칼과 꽃 중에서)



정변을 일으킨 연개소문보장왕을 고구려 28대 왕으로 옹립하였고, 대막리지의 지위에 올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당 태종은 644년 2월, 많은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했다는 죄목을 들어 고구려와의 전쟁을 선언합니다.

 

반응형


당 태종은 이전의 수나라가 군량 조달에 차질을 빚어 고구려에 패배했다는 점에 착안하여(살수대첩 당시 보급부대 편성 없이 진군했던 일) 병력을 무리하게 진격하지 않고 원활한 보급을 위해 수군의 역할을 중요시했으며, 포차(여러 사람이 줄을 당겨서 바위를 멀리 날리는 공성무기)와 같은 무기 개발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포차 이미지



마침내 644년 11월, 당 태종장량을 평양도 행군 대총관으로 임명하여 4만 3천의 수군과 5백여 척의 전함을 동원하여 평양을 공격하도록 지시하였고, 이세적을 요동도 행군 대총관으로 임명하여 6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진군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 태종 또한 6군을 거느리고 직접 친정하여 요동으로 향했습니다.
이때 남쪽 방면으로는 영주 도독 장검이 거란, 해족 등의 이민족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고 건안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른바 1차 고당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위에서부터 요동도행군, 당 태종의 6군, 영주도독 장검의 군대, 장량의 수군입니다.

 

이때 당나라가 참전한 병사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게 잡아도 수십 만이 넘는 대군이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리고 당 태종이 이끄는 6군은 요택(요하 하구의 늪지대)을 건넌 후 도하 장비를 모두 불태우면서 결의를 다지지만 이는 훗날 악수로 작용하게 됩니다.

645년 4월, 북쪽 방면의 요동도행군 대총관 이적현도성을 공격하였고, 부총관 이도종은 수천의 병사로 신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되지 않자 주력을 남쪽인 개모성으로 돌린 후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개모성은 이세적과 이도종의 요동도행군에 맞서 당나라의 좌둔위 장군 강확을 전사시키며 분전했으나 열흘 남짓한 공방전 끝에 함락되면서 2만 명의 백성과 양곡 10만 석이 당나라의 수중에 떨어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장량이 이끄는 당의 수군은 천리장성의 최남단에 위치한 비사성을 공격하였습니다.
비사성은 삼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으나 당 수군의 야습을 받고 함락되면서 8천여 명의 백성이 사로잡혔습니다.

천리장성의 최남단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 비사성의 전경입니다.

 

이때 개모성을 함락시킨 당나라 요동도행군은 거점을 마련하고, 전열을 정비한 뒤 요동성으로 향했습니다.

요동성은 일전에 수나라의 2차 침입 때 113만 대군을 막아냈으며, 그 이후의 침공에도 끝끝내 버텨내면서 난공불락의 위세를 거리낌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수나라의 침입을 완벽하게 막아낸 요동성이 이번에는 무기와 병력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당나라의 대군을 막아낼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는 제1차 고당전쟁_요동성 전투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