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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고구려의 역사

광개토태왕, 고구려의 전성기를 열다!

by 역사채우기 2021.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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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vdYGOYbZYlg

 

이번 시간에는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이끈 광개토태왕의 일대기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 광개토태왕 즉위 이전 고구려의 상황

고구려는 16대 왕이었던 고국원왕 시기 서쪽으로는 모용황(중국 오호십육국 시기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의 1대 왕)이 이끄는 전연의 군대에 대패하여 15대 왕 미천왕의 시신과 태후 주씨(고국원왕의 어머니), 그리고 5만 명의 포로까지 잡혀가는 수모를 겪었으며, 남쪽으로는 전성기를 맞아 무서운 기세로 진출해오는 근초고왕의 백제군과 맞서다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고국원왕(드라마 근초고왕 중에서)

그리고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수림왕(고구려 17대 왕) 시기에도 위기는 지속되어 거란족의 침입으로 8개 부락이 약탈당하고, 1만여 명의 백성들까지 잡혀가는 일이 발생하지만, 백제와의 전쟁에서는 근초고왕근구수왕의 군대를 연이어 물리침으로써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합니다.
또한, 태학(고구려의 국립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율령(형벌과 행정에 관한 법규)을 반포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함으로써 전성기를 이룩할 기반까지 마련하였습니다.


이후 고국양왕(고구려 18대 왕) 시기에는 후연이 차지하고 있던 요동 지방을 공격한 뒤 다시 뺏기긴 했지만, 요동 지방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의의가 있었고, 소수림왕이 쌓아놓은 기반 위에서 고구려군의 전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 광개토태왕의 즉위

시간이 흘러 391년,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태자였던 고담덕이 19대 왕(광개토태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광개토태왕은 1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뛰어나고 활달한 뜻이 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소수림왕 대부터 지금까지 국력을 추스르면서 후연, 백제 등의 주변국이 고구려에 어떤 피해를 끼쳤는지,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구려 19대 왕으로 즉위한 광개토태왕

 


| 백제 정벌

광개토태왕의 1차 목표는 백제였습니다.
392년 7월, 광개토태왕은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남진하여 석현성을 비롯한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진사왕(백제의 16대 왕)은 이전에 고국양왕 시절의 고구려군과 싸워 승리한 일이 있었지만, 광개토태왕이 병법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방어하지 못했고, 이는 한강 북쪽의 여러 부락이 함락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진사왕(드라마 광개토태왕 중에서)


고구려군은 기세를 타고 백제를 계속 공격하였고, 10월에는 백제의 북방 요충지인 관미성에 이르렀습니다.
관미성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관미성은 백제 정예 수군의 주둔지인 동시에 4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하의 요새였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군은 거침없이 7개의 길로 나누어 공격을 시작하였고, 20일간의 공방전 끝에 함락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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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요새 관미성(드라마 광개토태왕 중에서)

 

같은 해 12월, 진사왕이 사망하자 아신왕이 백제의 17대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일설에는 진사왕이 아신왕에게 피살되었다고 합니다)


백제의 아신왕은 지난날의 패배를 설욕하고, 빼앗긴 성을 되찾기 위해 계속해서 고구려를 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백제의 공격은 393년에는 관미성, 394년에는 수곡성에서 막혔고, 395년에는 패수에서 백제군 8,000여 명이 죽거나 사로잡히면서 번번이 좌절되었습니다.
396년, 백제의 공격을 모두 물리친 고구려는 백제에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였고, 수륙군을 동원하여 사방에서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포위하자 이를 버티지 못한 아신왕광개토태왕에게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며 항복하였습니다.

아신왕이 광개토태왕에게 항복하는 장면(드라마 광개토태왕 중에서)

또한, 이번 백제 원정으로 한강 이북의 58개 성700여 개의 촌락까지 점령하였으니 할아버지(고국원왕)의 원수를 톡톡히 갚았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 거란, 숙신 정벌

거란족은 소수림왕 시기 고구려를 공격하여 여러 부락을 약탈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광개토태왕은 즉위 후 얼마 안 된 시기인 동시에 백제 정벌 중이었던 392년 9월, 북쪽의 거란족을 공격하여 고구려 백성을 되찾아오는 동시에 500명의 거란족 포로까지 잡아오는 성과를 이루어냅니다.


이후 395년, 광개토태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3개 부족을 격파하니, 600~700영에 이르는 부락을 정복하고, 잡은 마소(말과 소)와 양떼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 원정을 통해 염수에 있던 풍부한 소금 지대까지 확보하였으므로 경제적인 이득도 상당히 취할 수 있었습니다.

소금은 고대 로마시대 때 군인의 급료로 사용되었고, 화폐로도 통용될만큼 경제적인 가치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거란 정벌을 통해 서북방을 안정시킨 광개토태왕은 398년, 군대를 파견하여 숙신(퉁구스계 민족으로 말갈, 여진족의 조상) 땅을 시찰하고 포로를 잡아오자 숙신의 무리가 신하의 예를 다하여 공물을 바치고 복종하였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고구려 광개토태왕백제, 가야, 왜나라 연합군의 전쟁과 후연, 동부여 정벌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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