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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발해의 역사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일대기

by 역사채우기 2021.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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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KAqd2Th6LA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드라마 대조영 중에서)

 

 

| 연개소문의 죽음과 고구려의 분열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들은 대막리지의 자리를 놓고 내전을 벌이면서 고구려의 상황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결국,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연남생(연개소문의 첫째 아들)은 조국을 배신하고 당나라에 투항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연남생이 거느리고 있던 고구려에 복속 중인 말갈과 거란족, 그리고 고구려의 성과 백성들까지 수십만 명에 이르는 행렬까지 당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당 태종 이세민(당나라의 2대 황제) 시절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집요하게 공격했고, 이전의 수나라와는 달리 고구려의 주요 성인 요동성, 백암성, 개모성, 비사성 등을 함락시키며 파죽지세로 밀고 나갔지만 안시성에서 안시성주(야사에 따르면 안시성주는 양만춘이라고 함)의 방어에 막히면서 철군하게 됩니다.

영화 안시성에서의 당 태종 이세민

 

 

후일 당 태종은 중국 사람들에게 명군으로 칭송을 받았고, 천책상장(하늘에서 내려온 장수)라는 호칭을 사용할 정도로 군사적 식견 또한 뛰어났으나 고구려의 굳센 방어를 뚫지는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이후 당 태종은 숨을 거두면서 다음 황제가 될 당 고종 이치에게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고구려는 결코 쉽게 무너질 나라가 아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제3차 고당전쟁

하지만 20년 후, 상황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당나라에 너무나도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남쪽에서 신라를 견제해주던 백제는 멸망했고, 북쪽의 돌궐도 제압되었으며, 고구려 변방에 있던 부족들은 모두 당나라에 복속된 상태였습니다.

 

거기다 고구려의 기밀을 잘 알고 있던 연남생이 스스로 찾아오다니 이건 당나라 입장에서 절대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667년, 당나라는 전 대막리지였던 연남생을 앞세워 5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고, 신라 역시

문무왕이 김유신 등 2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이에 맞서 부여성, 신성 등지에서 항전하였으나 함락되었고 수도였던 평양성마저 승려 신성이 성문을 열어주면서 고구려는 멸망하였습니다.

평양성 보통문 사진

 

 

 

고구려 부흥운동

고구려는 멸망했지만, 당나라의 폭압 통치에 맞서 고구려의 영토 곳곳에서는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으나 670년에 황해도 재령 부근에서 부흥운동을 펼치던 안승검모잠을 죽인 후 신라에 투항하였고, 당나라의 침입을 숱하게 막아냈던 안시성 또한 671년 함락되면서 고구려 부흥의 불씨가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 이진충의 난과 기회!

하지만 시간이 흘러 696년 큰 기회가 찾아오는데, 요하 서쪽의 영주 지방에서 영주도독 조문홰가 주민들을 상대로 가혹한 통치를 일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진충의 난의 원흉이며,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는데 영향을 끼친 조문홰(드라마 대조영)

 


당시 영주에는 원주민인 거란족, 멸망 후 강제이주해온 고구려 유민과 그를 이끌던 대조영 세력, 그리고 고구려에 예속되었거나 협력해온 말갈족과 그를 이끄는 걸사비우 등이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중 거란족이 이진충손만영을 필두로 봉기하여 조문홰를 죽이고 영주를 점거하면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영주 일대의 혼란을 틈타 대조영은 아버지인 걸걸중상, 말갈군을 이끄는 걸사비우와 함께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영주를 탈출하여 동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거란의 반란은 거셌으나 이내 진압되었고, 당나라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측천무후가 걸걸중상에게 진국공, 걸사비우에게 허국공을 책봉하여 회유하려 했으나 이들은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 천문령 전투

회유에 실패하자 당나라는 거란의 항장 이해고를 우옥검위대장군으로 임명한 후 대군을 주어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토벌하도록 했고, 이에 걸사비우가 말갈군을 이끌고 당나라에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한 후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무렵, 걸걸중상 역시 병 또는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죽게 되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운명은 대조영의 손에 달리게 되었습니다.

 

대조영은 걸사비우의 패잔병을 수습한 후 남은 무리와 함께 계속 동쪽으로 진군하면서 전투를 벌였고, 마침내 천문령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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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령에 도착한 대조영은 산세가 험하고 매복 습격이 유리한 지점을 찾아 그곳에서 추격해오는 당나라군을 맞을 준비를 했고, 날쌘 군사 3천 명을 선발해 당나라 군사를 유인하자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군이 천문령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습니다.


이때, 천문령 골짜기에 매복하고 있던 대조영 부대는 일제히 공격하여 막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구당서>에 따르면 이해고만 겨우 탈출해왔을 정도로 당나라군을 전멸시켰고,  
이를 계기로 발해를 건국할 기반을 닦게 되었습니다.

천문령전투를 묘사한 민족기록화

 

 

 

| 발해의 건국

남은 무리를 이끌고 다시 동쪽으로 향한 대조영이 동모산에 성을 쌓고 터전을 마련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옛 고구려 땅에 흩어져 있던 유민들이 대조영에게 모여들었습니다.


698년,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만에 대조영은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발해라 했습니다.

남북국시대_북쪽의 발해와 남쪽의 신라

 

 

이에 당나라의 측천황제는 다시 발해를 토벌하려 했으나 길목에 있던 거란해족이 돌궐에 항복했기 때문에 길이 막혀 발해를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대조영은 당나라의 북진정책을 위협하던 돌궐과 외교 관계를 구축했고, 700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주변국과의 외교에 힘쓰고 나라의 기틀을 잡았습니다.

<사불허북국거상장><동사강목>에는 "발해의 왕이 신라와 수교를 맺고 싶어 사신을 보냈는데,
효소왕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대아찬이라는 관작을 하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상황은 <구당서> <신당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705년, 당나라에서 측천황제가 죽고 중종이 즉위하자 시어사 장행급을 사신으로 보내서 회유하였고, 대조영은 아들을 당나라에 보냈습니다.

713년,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서 대조영에게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의 벼슬을 내리고 다스리는 지역을 홀한주로 만들어 홀한주도독으로 삼았습니다.

719년에 대조영이 죽자 당 현종이 조문 사절을 보냈고, 그 맏아들 계루군왕 대무예로 하여금 아버지의
뒤를 잇게 해서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책립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대조영의 아들이자 발해 2대 왕인 대무예(무왕)의 일대기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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