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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발해의 역사

발해의 또다른 시작! 발해부흥운동

by 역사채우기 2021.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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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uU7UHdDmivM

 

 

 

이번 시간에는 발해 멸망 후 이어진 발해부흥운동(후발해, 정안국, 흥요국, 대발해국)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 후발해의 역사

925년 요나라(거란족)의 침입으로 926년에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가 함락되면서 발해는 멸망하였습니다.

 

발해의 멸망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6

 

발해는 왜 멸망했을까?

https://youtu.be/QtCcFjkpgXU 이번 시간에는 발해의 멸망과 그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발해의 10대 왕인 선왕이 무너져가던 발해를 일으켜 세워 전성기를 이룩했고(해동성국) 11대 왕인 대이진과 1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요 태조 야율아보기는 발해의 옛 땅에 동란국 또는 동단국(요나라의 괴뢰정권)을 세우고 태자인 야율배를 왕으로 삼은 후 발해 유민을 통치하였습니다.

요나라를 건국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야율아보기

 

 

하지만 부여부에서 상경용천부에 이르는 길목 외에는 아직 점령되지 않은 상태에서 야율배와 동생인 야율덕광이 권력다툼을 했는데 야율배가 밀리면서 후당으로 귀순하였고, 927년 동란국의 수도를 상경용천부에서 요양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발해 유민은 이를 기회로 삼아 반거란 항쟁을 펼쳤고 929년경 후발해를 세우면서 결실을 보았습니다.

후발해는 건국 직후부터 여러 차례 후당과 일본으로 사신을 보냈고, 975년에는 거란을 피해 도망 온 발해 출신의 장수 연파와 함께 부여부를 공격하고, 발해의 옛 장령부 지역이었던 휘발하 유역에서의 전투에 원군 7천 명을 보내는 등 외교와 군사작전에 힘쓴 기록이 있습니다.

 

 

후발해의 멸망은 938년, 1003년, 1007년, 1114년 등 확실한 기록이 없고,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여 멸망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 정안국의 역사

고려사에 따르면 934년에 발해의 세자였던 대광현이 수만의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귀순하였고, 고려의 태조 은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발해 왕실의 제사를 받들게 하는 등 후하게 대접하였습니다.


이후 938년경 발해의 귀족 출신인 열만화서경압록부(발해의 5경 중 하나)를 중심으로 정안국을 건국하였고, 970년 송 태조에게 사신을 보냈습니다.

 

이후 976년경 오현명이 정안국의 2대 왕으로 즉위하였고 연호를 '원흥'으로 제정하였습니다.

 

 

981년 오현명은 송 태종(송나라 2대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송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나라를 협공하여 발해를 부흥시킬 계획이 있었습니다.

 

 

아래는 정안국 왕 오현명이 송 태종에게 보내는 국서의 일부입니다.

정안국왕 신 오현명이 아룁니다. 신은 본래 고구려 땅에 살던 발해 유민으로서 근년에 거란이 강포한 힘만 믿고 우리 영토를 침략하여 성채를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으나, 저희 할아버지께서 절개를 지켜 항복하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난을 피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힘을 길러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부여부가 근래에 거란에서 등을 돌려 우리나라에 귀순하였으니, 재앙이 장차 이르게 되면 이보다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천자의 조정으로부터 비밀 계획을 듣고, 정예의 군사를 거느려 거란 토벌을 돕고자 합니다. 기필코 원수를 갚고 싶으니, 감히 명령을 거역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신 오현명은 진실로 간절히 원하며 삼가 고개를 숙입니다

 

 

당시 송나라는 후진의 석경당이 요나라에 연운 16주를 넘겨준 것을 되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고, 정안국 또한 발해를 멸망시킨 원수(요나라)를 갚아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둘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습니다.

지도에서 노란색 부분(연운 16주)

 

 

하지만 송나라는 서하의 침입을 막느라 요나라를 공격할 여력이 부족했고, 결국 협공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곧 983년과 985년 2번에 걸친 요나라의 침입을 받는 빌미를 제공했고, 2차례의 침입에 막대한 타격을 입은 정안국은 986년에 멸망하면서 10만 명이 포로로 잡혔고, 20만 필의 말이 노획되었습니다.

 

 

 

| 흥요국의 역사

시간이 흘러 1029년, 기근이 든 상태에서 요나라가 소금과 술을 독점하고,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자 발해유민들의 삶은 궁핍해졌는데 발해의 왕족이자 동경사리군 상온 대연림이 동경유수 소효선을 가두고, 그 일파를 제거한 뒤 반요감정을 이용해 발해유민들을 규합하여 요나라의 동경요양부에 흥요국을 세우고 연호를 '천경' 또는 '천흥'으로 제정하였습니다.

 

 

흥요국에는 발해의 피지배층이었던 여진족도 합류하였고, 건국 직후 고길덕을 고려에 보내 지원을 요청하자 참지정사 곽원이 이에 응하여 발해, 여진, 고려의 연합이 결성되었습니다.

흥요국과 여진족, 고려의 연합

 

 

하지만 흥요국의 부유수 왕도평은 배신하여 요 성종(요나라 6대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의주를 지키던 발해 태보 하행미는 요나라에 협조하였습니다.

요 성종(드라마 천추태후 중에서)

 

 

게다가 고려의 곽원은 의주를 공격했으나 하행미에게 가로막히자 홧병으로 죽었고, 하행미 또한 요나라에 이용만 당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흥요국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고려에 여러 차례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때마다 고려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029년 10월, 요나라의 남경유수 소효목, 국구상온 소필적, 해육부대왕 소포노 등이 요양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흥요국은 극도로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1년 가까이 방어하였습니다.

 

그런데 1030년 8월, 대연림의 부하였던 양상세가 요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었고, 대연림이 체포되면서 흥요국은 1년 만에 멸망하게 됩니다.

 

 

 

| 대발해국의 역사

1116년, 발해가 멸망한 지 200년이 돼가는 시점에도 발해 유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던 반면, 요나라는 신흥강국 금나라(여진족이 세운 나라)의 공격을 받아 쇠퇴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당시 요나라의 동경유수 소보선은 이전에 흥요국이 세워지기 직전과 다를 것 없이 발해 유민에게 수탈과 착취를 일삼고, 조세를 가중하였기 때문에 발해 유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1116년 정월, 고영창은 소보선을 죽인 후 8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약 100년 전 흥요국을 세웠던 땅인 요나라의 동경요양부를 점령하고, 대발해국을 세운 뒤 연호를 '융기' 또는 '응순'으로 제정하였습니다.

 

 

대발해국은 10일 만에 동경도 산하의 50개 주를 장악하였고, 적이었던 요나라 황족 야율여도도 합류할 정도로 기세등등했으며, 1116년 5월에 고영창은 금나라의 태조 완안아골타에게 연합하여 요나라를 협공할 것을 제안하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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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를 건국한 완안아골타의 동상

 

 

그러나 아골타는 연합 조건으로 요동의 점거와 황제 칭호를 버리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고, 고영창은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금나라는 알로를 보내 대발해국 공격을 명령합니다.

 


이에 대발해국은 요나라와 금나라에 양면으로 공격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결국 금군에 의해 요양성이 함락되었고 고영창이 남은 군사를 이끌고 장송도로 들어갔으나 뒤쫓아온 금군에 잡혀 죽으면서 대발해국은 건국된 지 5개월 만에 멸망하였습니다.

 

 

이를 끝으로 약 200년에 걸친 발해부흥운동은 종결되면서 남은 발해 유민은 금나라 군대에 차출되어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송(송나라)을 남송으로 몰아내는데 큰 역할을 수행합니다.

금나라의 전성기 지도

 

 

그리고 200년에 이르는 동안 발해 유민이 세운 나라가 내분이 있거나 망할 때마다 일부는 고려로 귀순하여 한민족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발해의 역사를 끝맺으려고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대몽항쟁에서 귀주성 전투의 영웅 김경손 장군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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