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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발해의 역사

신생국 발해와 최강대국 당나라의 전면전

by 역사채우기 2021.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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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8MSjJeiWzhQ

 

 

| 발해 무왕의 즉위

719년,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이 죽자 그의 아들인 대무예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고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제정했습니다.

 

이후 발해 무왕(발해 2대 왕, 대무예)은 대외 확장을 하여 발해 주변에 위치한 여러 나라를 복속시키며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전성기 발해의 지도

 

 

이때 일본에 보낸 국서에는

 

“여러 나라를 아우르고 여러 번국을 감독하니 고구려의 옛 거주지를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지녔다.”

 

라고 표현하였고 [신당서]에는

 

발해가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동북의 모든 이민족이 겁을 먹고 그를 섬겼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당나라와 흑수말갈의 연합

발해가 이처럼 대외적으로 국력을 신장시키자 발해의 동북쪽에 위치한 흑수말갈당나라는 위협을 느끼고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서로 접근하였습니다.

흑수말갈과 당나라의 연합

 


722년, 흑수말갈의 추장 아속리계가 당나라를 방문한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당나라는 크게 환대했고, 726년에는 당나라가 흑수말갈을 흑수주로 삼는다고 공포하여,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특별한 관계임을 선언했습니다.

 

 

한편, 이 소식을 알게 된 발해의 무왕흑수말갈이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면서 이전까지 잘해오던 보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나라와 흑수말갈이 서로 연대하여 발해를 공격해올 것으로 판단하였고, 아들이자 왕자인 대도리행을 당나라에 보내 당나라와 흑수말갈의 관계에 대해 항의하였으나 당나라는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 대문예의 당나라 망명

이에 무왕흑수말갈을 공격하여 난국을 타개하려 하였고, 동생인 대문예를 사령관으로 삼아 장인 임아와 함께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하지만 당나라에서 숙위로 8년 동안 머무른 경험이 있던 대문예는 당나라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출정에 반대하였습니다.

 

“흑수말갈을 공격한다면 당나라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당나라와의 전쟁은 발해를 멸망시키는 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당나라는 발해보다 월등히 군사가 많다.

지난날 고구려가 강성하여 30만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와 싸웠지만 결국 멸망했다.
지금 발해의 군사 수는 고구려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는 당나라에 대항해 싸워서는 안 된다.”

 

 

그래도 무왕은 출정을 강요했고, 대문예는 흑수말갈의 국경에서 다시 한번 공격을 반대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무왕은 사령관을 대문예에서 대일하(무왕과 대문예의 종형)로 교체하여 흑수말갈 공격을 강행했고, 대문예를 소환하였습니다.

 

 

그러자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한 대문예는 군영을 탈출하여 당나라로 망명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약 50년 전 대막리지였던 연남생이 당나라로 도망갔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의 아들이자 전 대막리지였으나 당나라에 투항한 후 고구려를 공격한 매국노 연남생(드라마 대조영)

 

 

그렇게 당나라에 도착한 대문예당 현종(당나라의 6대 황제)에게 벼슬을 받고, 극진한 대접을 받는 등 크게 환대하자 화가 난 발해 무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대문예를 처형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당나라 6대 황제 이융기(현종)(출처 : ko.wikipedia.org)

 

 

그러자 당 현종은 대문예를 영남 지방으로 귀양보냈다고 속이고 대문예를 몰래 피신시켰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 현종이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무왕은 다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아래와 같이 강력하게 항의하였습니다.

 

"대국은 신의를 보여야 하거늘, 어떻게 속일 수가 있소이까?
바라건대 예전의 청대로 그를 죽이시오!"

 

한편 730년, 당나라와 발해 사이에 위치한 거란이 당나라에 맞섰으나 732년 3월에 거란이 크게 패했고, 근방에 위치한 해족마저 당나라에 항복하여 주변 정세가 발해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자신감을 얻은 당 현종은 무왕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습니다.

 

경은 당나라의 은혜를 모르고 마침내 짐을 배반하려고 한다.
경이 믿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짐은 근래 관용을 품고 중원을 보살펴 왔으나
경이 명을 받들지 않으면 언젠가는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 발해의 당나라 선제공격

게다가 발해는 대일하의 군대가 흑수말갈을 공격했음에도 흑수말갈은 여전히 당나라와 협력 관계에 있었으니 무왕은 엄청난 결단을 내리는데, 바로 당나라를 선제공격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켰을 때와 다르지 않게 최강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고, 당 태종의 정관의 치와 더불어 개원의 치를 이끈 당 현종이 재위하던 시기였으니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732년 9월, 무왕은 장문휴를 보내 등주 공격을 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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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휴가 공격한 당나라 등주의 모습

 

등주의 위치(산둥반도에 위치해 있다)

 

 

당시 등주는 당나라 무역의 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나라와 당나라의 수군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도 거쳤던 곳이었습니다.

 

732년 9월 5일, 등주성에 도착한 발해군은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등주자사 위준까지 전사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발해군의 침공으로 성읍이 도륙되었고, 많은 유민과 실업사태를 일으켜 등주를 완전히 파탄시켰다.
- [신당서]

등주를 공격하는 발해 장군 장문휴의 군대(민족기록화)

 

 

 

| 발해 돌궐 거란 VS 당나라 신라 흑수말갈

이에 당나라는 대문예를 사령관으로 삼아 발해군을 막으려했으나 이미 발해군은 철군한 뒤였고, 이 소식을 들은 무왕은 분노하여 대문예를 암살하기 위해 당나라에 자객을 보내는 강수를 두었습니다.

대문예를 암살하러가는 자객들

 

 

무왕이 파견한 자객들은 당나라의 천진교에서 대문예를 만나 일전을 벌여 암살하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무왕은 거란, 돌궐과 연합하여 앞으로 있을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합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당나라 역시 신라를 끌어들여 발해의 후방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무왕 시기 발해와 주변국의 지도

 

 

733년 1월, 신라는 10만 대군으로 발해를 공격하였으나 추위 때문에 병력의 절반이 죽자 후방이 안정된 발해는 무왕이 직접 친정하여 마도산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발해는 크게 승리하여 성읍을 점령한 반면 당나라는 1만여 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냈다고 합니다.

 

이에 당 현종은 위기의식을 느껴 하북지방 각 주의 군사를 징발하는 한편, 무왕만리장성을 넘어올 것을 예상해서 큰돌로 400리에 이르는 장벽을 쌓아 필사적으로 항전하여 가까스로 발해의 진격을 막아냈습니다.

중국의 만리장성

 

 

 

| 소강상태에 접어든 국면

이를 계기로 당나라는 발해를 더 이상 얕잡아 볼 수 없었지만, 734년, 당나라와 발해 사이에 있던 거란이 당나라에 크게 패하여 완충지대가 사라진 데다가 돌궐 또한 내분으로 붕괴되기 시작하자 국제 정세는 다시 발해에게 불리하게 작용되었습니다.

 

각 나라마다 긴장감이 멈추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 736년, 무왕은 더 이상의 전쟁을 멈추고 당나라에 전쟁포로를 보내면서 화해를 요청하였고, 당나라도 억류되었던 발해 사신을 풀어주었습니다.

 

 

 

이렇게 최강대국 당나라를 상대로도 주저하지 않고 2차례나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승리(등주 전투, 마도산 전투)하였고, 주변의 적국(당나라, 신라, 흑수말갈)을 상대로도 모두 승리를 거두며 발해의 영토를 크게 넓히고 국가적 위상까지 드높인 무왕은 737년 다사다난했던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발해 무왕 시기의 국제전 양상을 표현한 지도

 

 

 

다음 시간에는 발해의 전성기를 이끈 선왕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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