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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발해의 역사

발해는 왜 멸망했을까?

by 역사채우기 2021.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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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tCcFjkpgXU

 

 

이번 시간에는 발해의 멸망과 그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발해의 10대 왕인 선왕이 무너져가던 발해를 일으켜 세워 전성기를 이룩했고(해동성국) 11대 왕인

대이진과 12대 왕인 대건황까지 그 기세는 이어졌다고 합니다.

 

발해의 전성기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5

 

해동성국 발해의 전성기

https://youtu.be/7VsMYXEnVKU | 선왕 대인수의 즉위 818년 발해의 9대 왕인 간왕이 죽자 대인수가 10대 왕(선왕)으로 즉위하였고 연호를 '건흥'(建興)이라고 제정하였습니다. 연호의 뜻에서 알 수 있듯이

historicalhistory.tistory.com

 

발해의 전성기 시절 대외관계

 

 

 

| 발해와 그 주변국의 약화 

하지만 13대 왕인 대현석 시기부터 발해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발해 주변국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여 당나라는 황소의 난으로 결정타를 맞고 907년에 멸망하면서 5대 10국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신라는 진성여왕 시기부터 지방 호족들의 독립과 전국적인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경상도 일대에만 그 세력을 유지한 채 궁예의 후고구려와 견훤의 후백제로 나뉘어 후삼국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5대 10국 시대와 후삼국시대

 

 

 

| 거란족의 급성장

그러나 이 시기 당나라, 위구르 등 주변 강대국들의 전쟁에 휘말리고 복속되기를 거듭했던 거란족은 통제에서 벗어나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규합하여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895년에 당나라의 유주를 점령하였고, 903년에는 요북지방을 점령한 후 911년에는 해족습족을 병합한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거란은 916년에 요나라를 건국하여 중앙집권국가로 발돋움한 후 918년에는 발해의 군사적 요충지인 요동 지방으로 진출하여 발해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거란족을 통합하여 요나라를 건국한 야율아보기

[요사]와 [요동행부지]를 참고하면 야율아보기가 20여 년을 힘들게 싸워 발해의
요동 지방을 차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대인선의 외교

그리고 이와 같은 요나라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발해의 15대 왕)은 911년에 신라와 비밀 결연을 맺고, 후량일본에도 사신을 보내 외교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한편, 918년에 적국인 *요나라에도 평화사절단을 보내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 요나라 :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일하고 세운 나라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요나라에 방물을 바치고 거란의 발해 공격에도 군사를 보냈으며, 같은 국가를 계승한 후고구려(태봉)는 보검을 바치는 일이 발생하였고, 발해에 복속되어있던 흑수, 달고 등의 부족까지 이탈하여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습니다.

 

 

한편 923년, 중국은 후량이 멸망하고 이존욱이 당나라를 계승하여 후당을 건국하였습니다.

 

이존욱은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고, 그중에는 야율아보기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야율아보기의 부인인 술률평이 이존욱을 천하막적이라 칭할 정도로 기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후당을 건국한 이존욱

 

 

 

| 요나라의 첩자 파견과 서방원정 그리고 발해의 마지막 불꽃

924년, 요나라는 발해를 침공하기 전 야율탁진의 간언에 따라 배후지역인 서방원정에 착수하였고, 야율할저를 발해에 거짓으로 투항시켜 군사 기밀을 탐지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야율할저는 발해에 도착하자 장님 행세를 하여 주위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에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고, 임무를 완수한 뒤 발해의 말을 훔쳐 요나라로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장님 행세하면서 첩자 활동을 한 야율할저

 

 

이렇게 발해에 남은 건 전면전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후당의 요나라 견제와 요나라가 서방원정을 나간 빈틈을 이용하여 대인선은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고자 군사를 일으켜 요나라의 요주(요동지방)를 공격하여 요주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요나라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 개선하였습니다.

 

 

요나라는 서방원정으로 토욕혼, 탕구트, 타타르 등 여러 부족을 공략하여 발해 공격의 후환을 없앴고, 발해의 요주 공격 소식을 들은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중원 진출의 걸림돌로 여기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른바 두 가지 일 가운데에서 하나를 이미 끝냈다. 그런데 발해는 대대로 원수지간인데도 아직 설욕을
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925년 9월, 요나라의 침공이 임박한 이때 [고려사][고려사절요]에는 발해의 장군 신덕, 좌우위 장군 대심리, 예부경 대화균, 공부경 대복모 등 발해인 수백 명이 고려로 망명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발해의 좌수위 소장 모두간, 검교 개국남 박어 등이 발해인 수천 명과 함께 고려로 망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발해 지배층의 내투는 발해가 내부적으로 힘을 모아도 어려운 상황에서 멸망을 가속화시켰고

발해에서 극심한 내분이 있었음을 조심스레 추측할 수 있습니다.

 

 

 

| 발해와 요나라의 전쟁

마침내 925년 12월 21일, 요나라는 야율아보기와 그의 황후, 황태자 야율배, 대원수 요골 등을 이끌고 3방향으로 군을 나누어 발해 공격에 나섰고, 거란도를 따라 진군한 요군은 29일에 부여부를 급습하였습니다.

 

당시 이곳을 지키던 도독 대문진은 왕위쟁탈전에 가담하기 위해 수도인 상경용천부로 갔었던 상황이었고, 지휘관이 부재중인 상황 속에서도 부여부 군사들은 격렬히 저항하였고 야율아보기에게 치명상을 입히기도 했지만, 중과부적으로 926년 1월 3일에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요동 방면으로 진군한 요군이 장령부를 넘어 서경압록부로 진격하려던 계획은 발해군의 저항에 가로막혔고, 1월 9일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 근처에서 발해의 노상이 이끄는 3만 군사와 요나라 안단의 1만 군사가 격돌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발해군은 궤멸되고 말았습니다.

 

노상은 항복한 후 동단국(발해가 멸망한 후 요나라의 괴뢰정권)의 재상으로 임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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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부여부와 장령부를 공격하는 요나라

 

이 때문에 일설에는 노상이 요나라에 협력하여 발해군을 궤멸시키는데 협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 발해와 멸망

노상의 군사가 궤멸된 날 밤, 발해의 수도 홀한성(상경용천부)은 요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포위된지 4일째 되던 1월 12일, 발해 왕 대인선이 항복을 청하여 1월 14일에 3백여 명의 신하와 함께 항복절차를 밟았습니다.

 

이렇게 건국된 지 228년 만에 발해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부여부에서 상경용천부에 이르는 길목 외에 지방은 아직 건재하여 막힐부, 안변부, 현덕부, 정리부, 남해부, 장령부 등지에서 반거란 항쟁이 이어지자 야율아보기는 1월 17일 발해의 옛 군현에 조서를 내려 회유를 시도했습니다.

 

 

1월 19일에는 요나라의 장수인 강말달 등 13명을 홀한성으로 보내 발해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함과 동시에 무기를 수색하게 했는데 태도가 오만불손하여 발해의 군사들을 자극하였고, 분기를 참지 못한 발해군은 강말달 일행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러자 1월 20일, 대인선도 성문을 닫고 요나라에 다시 항전태세에 돌입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야율아보기대인선과 왕후를 포로로 잡은 후 요나라의 수도인 상경임황부의 서쪽에 성을 쌓고 살게 하였고, 대인선에게 오로고, 왕후에게 아리지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이 이름은 야율아보기와 그의 황후가 발해를 멸망시킬 때 탔던 말의 이름으로 굴욕을 선사한 것이었습니다.

요나라(거란)의 수도 상경임황부

 

 

이렇게 대인선이 주도한 발해의 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것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습니다.

 

요나라의 타격을 입지 않은 발해의 각 지방에서는 항복하지 않고 부흥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었고, 요나라가 멸망에 접어드는 시기까지도 발해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약 200년에 걸쳐 반거란 항쟁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200년간 이어진 발해의 부흥운동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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