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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3] 동래성 전투!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

by 역사채우기 2021.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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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sDBIdDCWys


1592년 4월 13일, 일본 제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18,700명의 군사와 700척의 전함을 이끌고 부산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고 다음 날인 4월 14일, 상륙하여 부산진성을 공격하였습니다.


부산진성의 백성들과 수백의 군사들은 첨사 정발의 지휘 아래 죽기를 각오하고 맞섰으나 모두 전사하면서 성이 함락되었고, 4월 15일에는 서평포다대포를 침략한 일본군을 다대포첨사 윤흥신이 군민들과 함께 결사항전하였으나 다대포성 역시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부산 일대에 교두보를 확보한 일본군은 동래성(현재의 부산광역시 동래구)으로 향했습니다.
동래성은 앞서 전투를 치렀던 부산진성과 다대포성보다 규모가 큰 성이었고, 동래성을 지키는 장군은 동래부사 송상현이었습니다.

동래읍성의 사진

 


| 송상현은 누구인가?

송상현은 앞서 종계변무사의 질정관(사신의 일원)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일이 있었습니다
이후 동래부사가 되어서는 외적이 침입한다는 소문을 듣고 동요하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안정시키는 한편, 왜관의 일본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위기의식을 느껴 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고, 마름쇠를 깔아두는 등 방비를 철저히 하였습니다.

 

* 왜관 : 일본과의 교역을 위해 만든 장소로 임진왜란 직전에는 부산포에만 있었음

 

이는 성에서는 외부 관측이 어렵지 않지만, 성 외부에서 동래성을 볼 때는 성이 잘 보이지 않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송상현은 문무를 겸비한 면모가 있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송상현 초상화

 


| 합류인가? 도망인가?

그리고 동래성에는 부산진성과 다대포성의 전투 소식을 듣고 경상좌도의 최고 지휘관인 경상좌병사 이각
일부 군사들을 이끌고 왔으며, 양산과 울산을 지키던 양산 군수 조영규와 울산 군수 이언성의 부대도 합류하였습니다.
이로써 동래성에는 2,500~3,000명의 병사가 모이게 되었고, 앞서 부산진과 다대포의 수백의 병력에 비한다면 군대의 규모가 훨씬 커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일본군은 동래성의 군사보다 몇 배나 더 많았음은 물론 수군도 합류하면서 병력의 격차는 더욱 커졌습니다.


게다가 전투 직전, 경상좌병사 이각은 적군의 군세에 당황하여 송상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래성 외부에서 성과 연계하여 싸우겠다고 한 뒤 경상좌병영 마저 버린 채 북쪽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동래부순절도(왼쪽 상단 부분에 말을 타고 도망가는 사람이 이각입니다)


만약 이각이 도망치지 않고 동래성과 연계를 하고, 조선수군 최고의 전력을 가지고 있던 경상우수사 원균이 배를 버리지 않고 경상좌수사 박홍과 힘을 합해 수륙으로 협공했다면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고 후속부대가 합류하는데도 난항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야욕을 좌절시켜 임진왜란을 종식시킬 가능성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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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생각으로 임진왜란을 끝낼 수 있는 최고의 시나리오


하지만 희망은 싸워보지도 않고 배를 자침시키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고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양산 군수 조영규는 늙은 어머니를 피난시키고 꼭 돌아오겠다며 성을 떠났습니다.


이를 보고 송상현은 어머니의 일을 핑계로 이각처럼 도망칠 궁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지만, 조영규는 약속한 날짜에 돌아와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

 


| 동래성 전투

한편,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은 4월 15일, 동래성을 포위한 뒤 부산진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공격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공격하기에 앞서

"싸울 것이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을 것이라면 길을 비켜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라는 글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

라고 답변하였습니다.


이는 송상현과 동래성의 군민들이 성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 표현이었으며, 곧이어 일본군이 성을 공격하면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일본군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조선군의 목표물을 유인하면서 조총을 발사해 피해를 최소화했으며, 조선군은 활과 대포를 쏘고, 돌멩이를 던지면서 기를 쓰고 일본군이 성벽을 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리고 무기가 없는 백성들은 농기구나 심지어 맨주먹으로도 일본군에 대항했으나 조총 사격 앞에 하나둘씩 쓰러져 갔습니다.


전투가 지속되면서 일본군이 성벽의 높이가 낮은 동문 쪽의 인생문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성문을 돌파하자 부녀자들까지 합세하여 지붕의 기왓장을 던지며 처절하게 항전하였으나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습니다.

부녀자들이 기왓장 던지는 장면(동래부순절도 중에서)


이윽고 전투의 패색이 짙어지자 송상현은 갑옷 위에 관복을 입은 후 북쪽을 향해(임금이 계신 방향) 절을 하고 부모님께 아래와 같은 시를 썼습니다.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
여러 진들은 단잠을 자고 있네
군신간의 의는 중하고
부모님의 은혜는 가볍도다


그 모습을 보고 조선에 사신으로 온 적이 있던 일본인이 송상현에게 극진히 대접받은 기억을 떠올려 송상현을 피신시키려 했으나 송상현은 거절하였고, 그렇게 단정히 앉은 채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송상현이 관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절을 하는 장면(동래부순절도 중에서)


이렇게 동래성이 함락되고 전투가 끝나자 고니시는 송상현의 충절에 탄복하여 송상현을 죽인 부하를 잡아 죽인 뒤 송상현의 제사를 지내주었지만, 그것이 동래성 군민에까지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당시의 여러 기록을 참고하면 성 안의 백성들은 시체 위에 던져져 천 명 중 한두 명만이 생명을 보전할 정도였기 때문에 곡해줄 사람이라도 있으면 다행일 정도라고 할 만큼 동래성의 상황은 매우 참혹했으며 현대에도 당시의 유골이 무더기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동래성 해자에서 발굴된 유골


그리고 이 전투에서 조선은 군민을 합쳐 5천 명이 모였으나 포로로 잡힌 500명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큰 피해를 입었지만 끝까지 싸운 점을 높이 평가받아 부산진첨사 정발, 다대포첨사 윤흥신과 함께 부산 충렬사에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일본군은 동래성 전투의 승리로 부산을 완전히 점령했으며, 일본의 후속부대가 속속들이 부산에 상륙하여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임진왜란4] 김해성 전투와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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