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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5] 상주 전투와 도망가는 관군

by 역사채우기 2021.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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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전투 이길 수 있을까?

이일은 3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대구로 향하려 했으나 당시 병조판서였던 홍여순은 무슨 일이든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는 나쁜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홍여순은 민간의 잡인들을 병적에 등록시켜 군대를 편성해 놓았고, 그 군대에는 서리와 유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 서리 : 각 지방에서 근무하던 하급 관료

 

게다가 급하게 징집된 잡인들이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았을 리 없었으며, 무기 대신 책을 들고 군대에 차출되기 싫다며 호소하는 유생들이 소란을 피우기도 하였습니다.


일각에서는 이일이 북병사로 근무하던 시절 조산보만호 이순신의 거듭된 병력 증원 요청을 거절하여 녹둔도에서 큰 피해를 받게 한 원인을 제공하였고(녹둔도 전투), 그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했던 일을 알고있던 병사들이 이일과 함께 내려가지 않으려 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 녹둔도 : 세종대왕이 4군과 6진을 개척한 이후 조선의 영토가 되었으며, 조선과 여진의 국경에 있던 두만강 하구의 섬

* 녹둔도 전투 : 1587년, 여진족의 침입으로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포로로 붙잡힌 사건으로, 이후 이순신과 경흥부사 이경록이 반격하여 60여 명을 되찾아 옴

녹둔도 전투

그렇게, 이일이 이끌고 있던 군사 중에 군사훈련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군관과 사수 60여 인에 불과했으니 군대의 기강이 심각하게 무너져 있던 당시 사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일은 서둘러 떠나야 했으니 군사들을 이끌고 수도 한양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진군 속도가 너무 빨라 이일이 도착하기 전, 대구의 군사들은 중앙에서 파견한 이일이 오지 않고 일본군은 근처까지 다다르자 두려움을 느끼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으며, 대구에서 만나기로 한 경상감사(경상도의 최고지휘관) 김수 역시 도망쳤습니다.


이는 제승방략체제의 심각한 단점이었습니다.

제승방략체제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의 이일은 누구인가? 부분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46

 

[임진왜란4] 김해성 전투와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

https://youtu.be/wyHFiJNSUew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 제1군이 부산의 여러 성을 함락하고 북진하고 있을 무렵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2군,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3군도 부산에 각각 상륙하

historicalhistory.tistory.com

 

4월 23일, 이일은 소식을 듣고 어쩔 수 없이 상주로 갔으나 상주목사 김해는 이미 도망쳤고, 군사들마저 뿔뿔이 흩어져버린 상태에서 판관 권길만이 상주성을 지키고 있는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 상주 전투

이일은 우선 식량창고에 보관 중인 곡식을 상주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며 군사를 모집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일은 한양에서 데리고 온 병사와 상주의 농민들을 합쳐 800~900명에 이르는 군대를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이일(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이일은 이 군사들을 데리고 상주 북쪽 북천 강변에서 진법훈련을 시키고 있었는데 한 백성이 달려와 일본군이 근처까지 왔다고 동네방네 소리치고 다녔습니다.


이일은 그 백성을 군영을 어지럽힌 죄로 감옥에 가둔 후 하루가 지난 뒤에도 일본군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참수했습니다.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4월 21일에 대구를 지나 구미까지 다다랐으므로 해당 백성의 말은 진실일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훈련은 계속되었고, 일본군은 몇 차례 척후병을 보내 상주성과 이일의 군대를 정탐하였고, 방비가 허술하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훈련 중이던 이일의 병사들은 일본의 척후병을 발견하였으나 참수된 백성의 일을 떠올려 이일에게 이 일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조선군을 정탐한 결과를 보고하는 일본군(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그러던 중 상주성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자 이일은 휘하의 군관을 보내 상황을 알아보게 했으나 숨어있던 일본군이 그 군관에게 조총을 쏜 뒤 목을 베어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조선군은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고, 이와 동시에 일본군이 조총을 쏘며 진군해오자 조선군은 금세 와해되어버렸습니다.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한양에서 데리고 온 사수들만이 활을 쏘며 대항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일본군은 사방에서 접근해오며 조선군 진영을 포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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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조총 쏘는 장면(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이렇게 전투는 순식간에 끝나버렸고, 일본군은 어렵지 않게 조선군을 제압하며 승리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종사관 윤섬과 박호, 찰방 김종무, 병조좌랑 이경류와 800~900명에 이르는 조선군이 모두 전사하였고, 순변사 이일과 소수의 군사만이 구사일생으로 상주를 빠져나와 충주신립 진영으로 합류하였습니다.


한편, 부산에 상륙한 이후로 연전연승을 거둔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충주에 다다랐고, 당시 조선 최고의 장수로 명망이 있던 신립과 마주하여 피할 수 없는 결전을 치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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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간에는 [임진왜란6] 탄금대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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