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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1] 전쟁의 시작! 부산진성 전투

by 역사채우기 2021.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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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UhyYSoJbFRU

 

이번 시간부터는 임진왜란을 시리즈로 이어나가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건조하고 시험까지 모두 완료한 날이 1592년 4월 12일이었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1592년 4월 13일, 일본 제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700척의 함대와 18,7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부산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습니다.

 

거북선에 대해 더 알고싶으시면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33

 

조선 최고의 돌격전함! 거북선

https://youtu.be/4bkZUX0zezw 이번 시간에는 조선 최고의 돌격전함인 거북선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태종 시기 첫 거북선 거북선은 조선 초기 1415년(태종 15년),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합니

historicalhistory.tistory.com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을 공격하기 전 천주교 신자인 동시에 상인으로도 활동했고, 사위가 대마도주인 소오 요시토시였으므로 조선이나 명나라와 교역을 자주 했기에 국제 정세에 밝은 편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제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그랬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계획(조선-명-인도 정벌)이 허황된 것이라는 걸 알고 반대했지만 먹혀들지 않고 전쟁 준비를 강행하자 돌연 조선 침략의 선봉장으로 자원하여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었습니다.

 


| 부산진성 전투

한편, 부산진성을 지키던 장군인 부산진첨사 정발절영도(현재의 부산광역시 영도구)에서 군사 훈련 목적으로 사냥을 하던 중에 적선이 몰려온다는 보고를 받자 처음에는 평소처럼 세견선이 오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점점 그 규모가 눈에 띄게 불어나자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게 됩니다.

 

* 세견선 : 일본에서 교역하기 위해 조선에 오던 무역선

 

정발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전선 3척을 자침시켰고, 인근에 사는 백성들을 모두 부산진성으로 불러들인 뒤 휘하의 군사들도 모두 집결시켜 일본군에 대항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또한, 부산진에 부임한 직후부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곽을 보수하고, 성벽 주위에 참호를 설치하는 등 방비에 힘썼기 때문에 부산진성을 지키는 군사는 1,000명이 채 되지 않았으나 성을 지키고자하는 결의는 남달랐습니다.

부산진성 사진


하지만 일본군 함대가 온다는 보고를 받은 경상좌수사 박홍은 조선 조정과 경상우수영, 그리고 전라좌ㆍ우수영에 일본군의 침략 사실을 알린 후 휘하의 전선을 모두 자침시켰고, 최소한의 군량과 무기를 챙긴 다음 나머지는 불을 지르고 동래성(지금의 부산광역시 동래구)으로 향했습니다.

각지에 전령을 파견하는 경상좌수사 박홍

전세가 불리하면 군수물자를 불태우고 퇴각하는건 옳은 행동이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모두 불태운 뒤 퇴각한 점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 경상좌수사 : 경상좌도의 수군 최고지휘관

 


이어서 소식을 들은 경상우수사 원균은 역시 70~100척에 이르는 전선을 자침시킨 후 도망을 치면서 부산진성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원균의 첫번째 삽질

한편, 일본군은 부산을 공격하기 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소오 요시토시와 척후병들이 먼저 상륙하여
부산진성의 수비상황을 정찰하였습니다.

그들은 부산진성의 경계가 삼엄하다고 보고하였고, 이에 고니시 유키나가는 상륙 명령을 내리지 않고 배 위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다음 날 새벽, 일본군은 목판에 '길을 비켜 달라(征明)'는 문구를 적어 조선군의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정발을 비롯한 군민들은 이를 단칼에 거절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공격을 개시하면서 임진왜란의 첫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부산진순절도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겹겹이 포위한 상태에서 세 방향으로 달려들었고, 고지대에서 조총을 쏘며 진군하는 동시에 일부는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이에 맞서 부산진성의 군민들은 정발의 지휘 아래 총통 등으로 대응하였고, 정발이 직접 활을 쏘며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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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징비록-부산진성 전투 영상입니다>



전투가 경과되면서 일본군은 생각보다 피해가 늘어나자 상대적으로 방어가 취약한 성의 북쪽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고, 이내 성문은 돌파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안그래도 불리하던 전세가 급격히 일본군 쪽으로 기울었고, 군사들은 성이 함락되기 전에 정발에게 몸을 피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며 끝까지 싸울 것을 표명합니다.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부산진첨사 정발의 동상


그렇게, 정발과 부산진성의 군민들은 끝까지 싸웠으나 병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져갔으며, 정발 역시 조총에 맞아 전사하면서 성은 함락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 승리한 후 부녀자어린아이는 물론이고, 개와 고양이까지 모두 죽였으며 진영 전체가 해골로 쌓였다고 기록할 만큼 전투 현장은 아비규환이었고, 뒤이어 상륙할 군대의 교두보까지 마련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일본군은 압도적인 전력 차에도 불구하고 결사항전한 정발의 공을 높이 사서 '흑의 장군(검은 갑옷을 입은 장군)'으로 찬양하였으며, 부산진성 전투에 참전했던 야나가와 시게노부는 후일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 자리에서

당시 조선군의 분전에 일본군이 고전했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전투 양상은 매우 치열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후 조선에서도 부산진첨사 정발을 기리기 위해 부산 충렬사에 위패를 안장하였습니다

부산 충렬사의 모습



다음 시간에는 [임진왜란2] 다대포성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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