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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47] 북관대첩(1) 함경도의 영웅 정문부

by 역사채우기 2021.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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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정창 전투국경인의 반란으로 함경도 전역을 손에 넣은 가토 기요마사여진족을 공격했다가 피해만입고 부하들과 순왜들에게 북쪽 변경 지방을 지키게 한 후 자신은 안변으로 내려왔습니다.

 

 

해정창 전투, 국경인의 반란, 가토 기요마사의 여진족 공격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6

 

[임진왜란34] 가토 기요마사의 함경도 진출을 막아라! 해정창 전투

| 일본군의 분할 진격과 조선 왕자들의 근왕병 모집 일본군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점령한 직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평안도로 진군하였고,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황해도로 진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7

 

[임진왜란35] 국경인의 반란과 임해군, 순화군의 악행

| 가토 기요마사의 함경도 점령 7월 17일~18일의 해정창 전투에서 조선군이 궤멸당하자 더이상 자신을 막을 군대가 없다고 판단한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 제2군은 다시 빠른 속도로 진군하여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8

 

[임진왜란36] 가토 기요마사의 여진족 공격과 지옥에 빠진 함경도

7월 17일~18일에 벌어진 해정창 전투에서 한극함이 이끄는 6진의 정예병력과 함경도 남병사 이영의 군대가 궤멸되면서 함경도를 수비할 병력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함경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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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만 해도 함경도 백성들은 이시애의 난과 이징옥의 난 등으로 인해 조선 조정으로부터 뿌리 깊은 차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순왜가 되어 일본군에게 협력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 이시애의 난 : 세조의 집권 정책에 반발하여 함경북도 길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

 


그러나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약과 관군의 분전, 그리고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제해권 장악으로 일본군은 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가토의 부대는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게다가 국경인, 그의 작은 아버지 국세필, 정말수 등의 순왜들 역시 이전의 임해군, 순화군이 그랬던 것처럼 백성들에게 갖은 행패를 부리고 약탈을 자행하니 함경도 백성들은 일본군과 순왜에게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군과 순왜에 반발하는 백성들(사진 출처는 드라마 대조영)



이 무렵,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는 함경도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자 인근의 관리들을 팔아넘기려는 순왜에게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신분을 숨긴 채 숨어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주위 사람들이 일본군, 순왜, 여진족에게 삼중고를 겪고 있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의병장이 되어줄 것을 여러 차례 간청하자 이를 수락하고 수백 명의 의병을 규합하였습니다.

여진족(후일 청나라)(영화 남한산성 중에서)



이후 정문부의 의병은 국세필이 다스리고 있던 경성으로 진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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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의 진군로와 경성으로 향하는 정문부 장군

 


그러자 국세필은 위협을 느끼고 항전 태세를 갖췄으나 이내 성을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성문을 열고 의병을 맞이했습니다.

경성에 입성한 정문부

 

"크고 작은 병사와 백성들이 예전에 범한 죄는 문책하지 말라"

 

라는 명령을 내리고 국세필이 이전처럼 군사를 거느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경성 읍성의 문루

 


이어 정문부가 격문을 쓰니 종성부사 정현룡, 경원부사 오응태 등의 6진 관료와 각지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의병에 합세하였습니다.

* 6진 : 경원, 경흥, 종성, 회령, 온성, 부령

 


이렇게 정문부의 의병은 3,500여 명으로 세를 불리게 되었으나 정문부는 당시 나이가 20대였고, 그 안에는 자신보다 직급이 훨씬 높은 사람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에 의병장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유생들과 의병들의 요청으로 의병장을 계속 맡기로 했습니다.

정문부 장군



이때 일본군은 정문부의 의병에게 경성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100명의 병사를 보내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려 했으나 척후장 강문우가 기병을 이끌고 수십 명을 사살하니 적병 소수가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도망갔습니다.

첫 전투에서 승리하자 의병의 사기가 올라갔고, 정문부는 여세를 몰아 진격하려 했으나 주위 사람들이

 

"앞으로 왜적을 토벌하려 하는데 국가에 반역한 적(순왜)이 아직도 진중에 있으니
먼저 토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순왜들을 먼저 토벌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매국노 처단이 우선!


이에 정문부는 국세필을 죽이기로 하고, 6진에 여진족이 침략해온 일을 핑계 삼아 국세필에게 군사의 일부를 주고 적을 막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후 성을 방비하는 척하면서 강문우가 국세필을 유인하여 국세필과 그 무리 13명을 포박한 뒤 모두 참수하였습니다.

북관대첩 민족기록화(창의토왜도)

 


그리고는 여진족의 침입까지 성공적으로 방어한 뒤 정문부가 백성들에게

 

"애당초 왜적과 내통해 역모하는데 앞장선 자들은 이들뿐이며, 이밖에는 참여한 자가 없으니
성 안 사람들은 모두 안심하라!"

 

라고 말하니 백성들이 모두 기뻐했습니다.



정문부는 종성진에서 국세필을 처형한 후 6진에 아래와 같은 격문을 썼습니다.

 

"수천의 의병들이 정의의 깃발을 들고 일어섰으니, 이제 곧 북계는 회복될 것이며 왜적도 물러갈 것이다.
누구든 의기 있는 자는 역적 국경인의 목을 쳐 죄인의 굴레를 벗고, 나라에 공을 세우라!"

 

순왜의 대표적인 인물 국세필을 죽인 뒤 다음 타겟으로 향하는 의병의 발걸음은 위풍당당했습니다.

회령의 국경인과 명천의 정말수

 


그 타겟은 바로 국경인!

 



다음 시간에 북관대첩(2) 석정령, 장덕산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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