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제3군의 진군
1592년 9월, 일본 제3군 선봉장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는 북쪽의 황해도에서 이정암의 군대와 싸웠고, 남쪽에서는 2만의 병력이 경상도의 완전 점령과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 창원으로 진군하였습니다.
이정암의 연안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88
당시 창원성을 수비하던 경상우병사 유숭인은 사천현감 정득열, 가배양 권관 주대청과 함께 2천의 병력을 이끌고 창원으로 진입하는 길목인 *노현에서 적을 방어하려 했습니다.
* 노현 : 현재의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 신방리 서쪽
9월 24일, 일본군 척후병이 노현 일대를 지나가니 얼마 후 산과 들이 적의 대군으로 뒤덮였으며, 그들이 지르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습니다.
이에 인근에 있던 조선군 일부가 동요하였으나 유숭인은 함부로 활을 쏘지 못하게 하고, 숨을 죽이며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 노현 전투
같은 시각, 일본군 또한 경계태세만 갖추며 조선군의 진영으로 접근해오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적의 기병 여럿이 모습을 드러내고 조선군 진영을 둘러보았습니다.
이에 조선군은 적군이 더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사정권에 들어왔을 때 일시에 활을 쏘아 명중시켰습니다.
9월 25일 아침, 일본군이 병력의 우세함을 앞세워 조선군 진영을 포위하였고, 조총을 쏘면서 접근하였습니다.
조선군은 용감히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진영을 도저히 사수할 수 없자 창원성으로 퇴각하였습니다.
이렇게 조선군은 궤멸되기 직전에 일부 군사를 수습하였으나 창원과 함안 지역의 백성들은 빠져나오지 못해 적에게 그대로 노출되었고 살인, 강간, 방화, 약탈 등의 온갖 만행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 창원성 전투
노현 전투에서 조선군을 물리친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창원성으로 곧장 진군하였습니다.
같은 날(9월 25일) 밤, 조선군은 창원성 방비에 여념이 없었으나 갑자기 일본군 80여 명이 성 내로 들어와 민가를 불태우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조선군은 성이 함락되어 일본군의 주력이 들어온 것으로 착각하여 사기가 바닥을 쳤고, 당장의 전투보다는 도망갈 생각에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유숭인은 탄식하며 성을 지킬 수 없음을 직감하고 성을 빠져나왔습니다.
이로써 노현 전투와 창원성 전투에서 조선군은 모두 패배하였고 창원은 적의 손에 떨어졌으며, 조선군 1,40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편, 가까스로 성을 빠져나온 유숭인은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일본군의 다음 목표인 진주성으로 향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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