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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51] 진주대첩(1) 전운이 드리우는 진주성

by 역사채우기 2021.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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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5일의 노현ㆍ창원성 전투를 모두 승리한 일본군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진출하는 관문인 진주성으로 향했습니다.

이 병력은 무려 3만이었으며, 그들을 이끄는 수장은 일본 제8군 선봉장이자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 그리고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군 전체의 총대장 역할을 수행하던 우키타 히데이에였습니다.

우키타 히데이에



한편, 진주성은 병사한 진주목사 이경을 대신하여 김시민이 진주목사로 성을 지키고 있었으며, 앞서 사천ㆍ고성ㆍ진해의 적을 공격하여 무찌른 바 있었습니다.

김시민 장군 동상(출처 : 위키백과)



하지만 진주성은 김시민의 병력 3,700과 곤양군수 이광악의 군사 100여 명을 합하여 3천 8백의 군사를 그느리고 있었으니 일본군의 군세에 비한다면 매우 열세인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곤양군수 이광악(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그렇지만 진주성은 외성과 내성, 즉, 이중성벽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성의 앞쪽에는 남강이 흐르고 있고 나머지 삼면에는 넓고 깊은 해자가 있어 쉽사리 함락시킬 수 없는 천혜의 요새였던 것이 방어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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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과 남강의 모습

 


게다가 김시민은 적이 진주성을 공격할 것이 확실해지자 의병장 최경회와 곽재우 등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방비를 철저히 하고 성 내의 백성들에게 친히 술과 고기를 나눠주어 사기를 북돋우고 안정을 취하는 한편,

 

"감히 달아나는 자는 참하라"

 

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0월 1일, 창원에서 패한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패잔병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왔습니다.

경상우병사 유숭인(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이는 병력이 부족했던 조선군 입장에서 지원군을 확보할 좋은 기회였지만 김시민은 성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자신(정3품)보다 상관인 유숭인(종2품)이 들어온다면 지휘계통에 혼선이 생겨 진주성을 방어하는데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전에 임진강 전투 때 조정에서 도원수 김명원과 제도 도순찰사 한극함에게 지휘권을 둘로 나누었기 때문에 작전상에 문제가 생겨 결국 패했던 일을 김시민이 생각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임진강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53

 

[임진왜란11] 거듭된 실책! 임진강 전투

https://youtu.be/DZsB1Pm05zI 일본군은 1군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평양으로(평안도로), 3군 구로다 나가마사가 황해도로, 2군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로, 4군 모리 요시나리는 강원도로 각각 진군하기

historicalhistory.tistory.com

 


그리고 그때는 임진강 전투의 패배로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하는 결과가 생겼고, 이번에 진주성이 함락된다면 전라도가 피해를 입는 것은 물론 조선 수군이 육로에서 공격받을 위험에 놓이므로 김시민은 더욱 신중하게 대처해야만 했습니다.

선조의 몽진 경로(출처 : 역사저널 그날)

 

 

적이 진주에 육박했을 때 유숭인이 말을 달려 성 아래에 이르러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김시민이 장수의 명령 계통이 전일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성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성문을 계엄 중에 열고 닫을 때 창졸간에 변이 있게 될까 염려되니 주장은 밖에서 응원해주면 좋겠다.' 하였다.

유숭인이 돌아오다 적을 만나 패하여 사천현감 정득열, 권관 주대청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곽재우가 김시민이 유숭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감탄하기를 '이 계책이 성을 온전히 하기에 충분하니 진주 사람들의 복이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이를 경상우병사 유숭인도 이해하고 외곽에서 성을 지원하기로 하고 돌아갔습니다.  


10월 4일, 마침내 일본군 1만여 명이 진주성 동쪽에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진주대첩에 대해 이어서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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