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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46] 이정암의 황해도 방어 작전! 연안성 전투

by 역사채우기 2021.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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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일본 제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김명원과 한응인이 지키던 임진강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임진강을 건넜습니다.

임진강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53

 

[임진왜란11] 거듭된 실책! 임진강 전투

일본군은 1군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평양으로(평안도로), 3군 구로다 나가마사가 황해도로, 2군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로, 4군 모리 요시나리는 강원도로 각각 진군하기로 정했고, 8군을 이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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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의 다음 목표는 개성이었고, 개성은 개성유수 이정형과 그의 형이었던 이정암이 지키고 있었으나 별 피해도 주지 못하고 개성은 함락되었습니다.

이정암은 개성이 함락되기 전에 전장을 탈출했고,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우리를 환영하는 자는 상을 주고 도망친 자는 목을 베겠다'며 회유하자 백성들이 술과 고기를 바치며 협력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이에 격분한 이정암이 의병장이 되어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니 1,400여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고, 조정에서는 그에게 황해도 초토사라는 직위를 내렸습니다.


이렇게 어느 정도의 의병을 확보한 이정암은 연안읍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연안읍성도



연안읍성은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연안 부사였던 신각이 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리하고,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 신각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부원수가 되었으며, 해유령 전투에서 임진왜란 육지전 최초의 승리를 이끌어 냅니다.

 

해유령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52

 

[임진왜란10] 조선 육군의 첫 승리! 해유령 전투

5월 2일, 도원수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이 지키는 한강 방어선과 유도대장 이양원이 지키는 한양 도성은 겨우 소수의 군사가 헤엄쳐오는 것을 겁먹고 도망치면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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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정암 역시 연안 부사로 부임했던 일이 있었고, 당시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인근의 백성들과 의병들을 효과적으로 통솔할 수 있었습니다.
괜히 1400명의 의병이 모여든 게 아니죠

8월 28일, 황해도 점령을 목표로 한 일본 제3군 선봉장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가 연안성 근처로 다가오자 이정암은 성을 지키기로 마음먹고

"내가 드디어 죽을 자리를 찾았다"

 

라며 결의를 다짐하였습니다.

구로다 나가마사



얼마 후 일본군 5~6천여 명이 연안성을 포위한 후 사람을 보내 항복하라는 서찰을 띄우자 이정암은 

 

"너희는 병(병사)으로 싸우지만 우리는 '의'로 싸운다"

 

라고 말하며 항복을 거부하였고, 본격적인 전투 준비에 돌입하였습니다.

 

그런데 겁도 없이 적장 한 명이 백마를 타고 성 인근을 서성이자 이정암 휘하의 장응기란 사람이 활을 쏘았고, 그대로 명중하자 의병의 사기가 올랐습니다.



8월 28일과 29일, 일본군은 조총을 쏘며 성에 접근한 후 성벽에 사다리를 걸어 공성전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정암은 화살의 낭비를 막기 위해 성벽을 오르는 적에게만 활을 쏠 것을 지시했는데 그런데도 화살이 빠른 속도로 소모되니 바위를 던지고 끓는 물을 쏟아부어 일본군의 입성을 필사적으로 저지하였습니다.

연안성 전투 민족기록화



9월 1일, 일본군은 성의 방비가 덜 갖추어진 틈을 이용하여 연안성을 총공격하였습니다.

그 기세가 천지를 진동시켰고,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찌르니 의병과 백성들은 모두 동요하였습니다.

대군을 이끌고 몰려오는 일본군(드라마 불멸의이순신 중에서)



이때 주위의 사람들이 이정암에게 성을 버리고 후일을 기약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정암은

 

"나를 따라 들어온 백성들을 차마 버릴 수 없으며, 성을 지키는 데 목숨을 바칠 것이니
어찌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라고 말하며 성의 사수를 고수하였고, 이어 자신의 주위에 풀을 쌓아 올린 뒤

 

"성이 함락되거든 일본군의 손에 죽을 순 없으니 여기에 을 놓아라"

 

라고 말하니 성 안의 사람들 모두가 감격하여 더욱 분전하였습니다.



이렇게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고 있던 때, 적진에 포로로 잡혀있던 역관 김효순이 탈출하여 연안성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역관은 "내일 아침까지만 버티면 적이 철수할 것입니다"라는 정보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러자 모두가 성을 지켜낼 수 있다는 희망에 사기가 하늘을 찔렀고, 거기다 일본군 쪽으로 바람이 불자 화공을 전개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습니다.

화공으로 불에 탄 진영




9월 2일 아침, 일본군은 연안성 함락을 포기하고 퇴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정암은 일본군을 순순히 물러가게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추격대를 편성했고, 일본군의 후미를 급습하니 당황하여 도망치는 자가 부지기수였습니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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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를 기습하는 조선군(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이 전투로 일본군이 노략질한 물건을 상당수 노획하였으며, 우마 90여 필과 쌀 130석까지 획득하였으나 이정암은 이것들을 모두 의병과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렇게 연안성 전투는 끝이 났고, 연안성을 끝내 사수함으로써 황해도의 곡창지대인 연백평야를 지켜냈고, 선조가 있는 의주에서 전라도까지의 교통로까지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평야(연백평야 아닙니다) 이미지



당시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이 이 전투를 두고 '조선의 안시성 전투'라고 칭할 정도였으니 연안성 전투가 가지는 의미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참고로 대몽항쟁 때 김경손, 박서 장군의 귀주성 전투를 고려의 안시성 전투로 칭한 기록이 있습니다.

 

귀주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8

 

12명의 결사대로 몽골군에 2번 승리한 김경손 장군

이번 시간에는 몽골의 침입 때 귀주성 전투와 이연년 형제의 난을 진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김경손 장군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https://youtu.be/JYMtOOW9d-U | 몽골의 침입 1225년 1월, 몽골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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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정암은 조정에 연안성 전투에 대한 장계를 올릴 때 

 

"적이 28일에 성을 포위했다가 2일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라는 아주 간략한 내용만 보고하였고, 이를 받은 조정에서는 당황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투의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된 후에는 이정암의 겸손함을 칭찬하였고, 동지중추부사로 임명하였음은 물론,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선무공신 2등으로 책록하였습니다.

연성대첩비(연안성 전투 기념비)




다음 시간에는 정문부 장군의 북관대첩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궁금한 내용이 있으시면 댓글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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