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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17] 8만의 군사를 동원한 조선! 반격의 서막이 될 것인가?

by 역사채우기 2021.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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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개국 이래 최대 규모의 군사 결집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후 초기에는 일본군에게 패하거나 도주하기 바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 한양까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활약으로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았고, 육지에서는 곽재우를 필두로 한 의병들이 궐기하면서 일본군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습니다.

거기다 조선 관군(육군)들도 반격을 가하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으니...

하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최고 지휘관들이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평택 모였던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수군만 연합하는게 아니라구~
스스로를 삼도근왕군이라 칭한 이들의 규모만 해도 전라도관찰사 이광(삼도근왕군의 맹주)의 군사 4만과 전라도방어사 곽영의 군사 2만,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군사 수백 명, 충청도관찰사 윤선각(윤국형)의 군사 8천까지 7만에 가까운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중간에 모인 경기도와 충청도의 피난민까지 합쳐져 13만의 군세를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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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정도전 중에서)(시기는 다르지만 규모를 설명하기엔...)



고려시대만 해도 초기에 광종(고려 4대 왕)이 편성한 광군의 규모만 30만이었고, 거란의 2차 침입 때 행영도통사 강조가 이끈 군사가 30만, 거란의 3차 침입 때 상원수 강감찬이 이끈 군사가 20만, 제2차 여진정벌 때 윤관이 이끈 별무반의 군사가 17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조선은 개국 이래 이와 같은 군사를 한꺼번에 동원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작정하고 끌어모았다 할 만큼 엄청난 대군이었습니다.

 

거란의 2차 침입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5

 

거란의 2차 침입과 전쟁영웅들의 등장

https://youtu.be/FsL4I__gyeQ 지난 시간의 거란의 1차 침입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거란의 2차 침입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거란의 2차 침입을 다루기에 앞서 지난 시간에 대한 설명은 아래 게시물

historicalhistory.tistory.com

 

거란의 3차 침입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6

 

고려와 거란의 3차 전쟁, 귀주대첩

https://youtu.be/2Ngd-h8D5kE 이번 시간에는 거란의 3차 침입과 귀주대첩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고려는 993년의 거란의 1차 침입과 1010년의 2차 침입을 연이어 막아내었고, 2차 침입 때 거란군의 회

historicalhistory.tistory.com

 

2차 여진정벌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8

 

고려의 2차 여진정벌

https://youtu.be/q4SM7BqGXJM 고려의 2차 여진정벌 #척준경 #사묘아리 #윤관 #별무반 #동북9성 고려는 과연 17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본 음성은 인공지능 성우 서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선조실록]에는 이 때문에 전라도 도내가 텅텅 비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6월 26일, 3도 근왕병이 진위 들판(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에 모이니 무릇 13만이었다. 깃발은 해를 가리고 군량 운반은 백여 리에 뻗쳤다.
- 연려실기술


* 용인 전투에서의 조선군 규모에 대해서는 [징비록]의 5만, [선조실록]과 [기재사초]에서의 8만, [연려실기술]의 13만(피난민 포함)으로 각각 차이가 있으며, 경상도는 이미 일본군의 손에 대부분 들어갔던 터라 경상감사 김수의 군사는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삼도근왕군 선봉장 vs 1600명의 일본군

6월 3일, 삼도근왕군수원 독산성으로 진군하니 수원에 있던 일본군은 삼도근왕군의 군세에 놀라 퇴각하며 조선군을 용인으로 유인하였습니다.

이때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선봉장 백광언과 전라도 관찰사 이광의 선봉장 이지시는 삼도근왕군의 맹주 이광에게

"우리가 군사 수는 많지만 여러 고을에서 급하게 모였고, 훈련도 제대로 못 받은 오합지졸이니 군사를 한곳에 모으지 말고 여러 진으로 나누어 둔다면 한 진이 패하더라도 주변의 진이 구원하여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고, 이긴다면 완전히 이길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으나 이광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삼도근왕군의 맹주 이광(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6월 5일, 삼도근왕군은 용인현 남쪽 10리에 진을 쳤고, 백광언을 보내 인근에 있는 적진을 정탐한 결과 일본군 600여 명이 북두문산과 문소산에 진지를 구축해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백광언은 이광에게 길이 좁고 나무가 빽빽해서 진격이 쉽지 않다고 보고하니, 일전에 백광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던 이광은 백광언이 군령을 어겼다고 말하며 곤장을 치도록 명했습니다.

이후 군장을 심하게 맞은 백광언

"차라리 적과 싸우다 죽겠다"

라고 말하고는 이지시와 함께 2천의 군사를 이끌고 문소산으로 진격하였습니다.


그렇게 진군한 조선군은 나무하고 물을 긷던 일본군 10여 명을 죽였으며, 그날 밤에는 적진을 기습하여 일본군 10여 명을 베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묘시(오전 5시~7시)부터 사시(오전 9시~11시)까지 일본군은 조선군의 공격에 응하지 않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병력 수에서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겁을 먹었을 수도 있지만, 한양에서 용인으로 오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원군 1천 여명을 기다렸던 것이 더 큰 이유였습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계속 일본군이 나오지 않자 충청도순찰사 윤선각의 군사도 함께 공격했으나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가 되면서 조선군은 긴장이 풀렸고, 짙은 안개까지 끼면서 시야도 좁아졌습니다.

이때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군대가 용인에 도착했고, 여지껏 나오지 않던 일본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언덕에 올라와 조총을 쏘아댔고, 일부는 풀 속으로 기어서 몰래 조선군의 진에 들어와 좌우에서 칼을 휘두르며 베고 찍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조총 겨누는 일본군(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그러자 조선군은 당황하여 제대로 싸우지 못하였고, 진중이 혼란에 빠진 와중에도 선봉장 백광언은 23명이나 베면서 분투했으나 이지시, 이윤인(고부 군수), 정연(함열 현감) 등과 함께 전사했으며, 윤선각의 충청도 군사들은 목숨만 겨우 건진 채로 퇴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있을 일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했으니..

 

 

 

다음 시간에 조선 최악의 패전인 용인 전투에 대해 이어서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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