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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대첩5

[임진왜란66] 제2차 진주성 전투(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광기 어린 분노 | 한양 탈환 1593년 4월 18일, 일본군이 수도 한양에서 철수한 후 남하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20일 만에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후 거의 1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때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옥포해전~웅포해전으로 이어지는 이순신 및 조선 수군의 활약과 더불어 전란 초기 패배와 도주하기에만 급급했던 관군이 의병과 합심하여 일본군에 결코 쉽게 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은 제대로 된 보급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몰아내긴 했지만, 여전히 대군이 남아있었고, 제4차 평양성 전투에서의 압도적인 화력을 맛보았던 경험 때문에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은 당시 한양에 있던 대부분의 지휘부가 모여서 공격했지만,.. 2022. 1. 19.
[임진왜란53] 진주대첩(3) 일본군을 물리친 모쿠소 호간 10월 9일, 10월 6일부터 시작된 진주성 공방전은 며칠간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우키타 히데이에의 일본군은 진주성 외곽에 있는 의병이 배후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진주성 함락에 매번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병력의 우세함을 앞세워 부대를 나누어서 의병을 향한 공격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전력을 집중시키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진주성 외곽의 의병들은 의병장 김준민 등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군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습니다. 이에 의병과 진주성의 군사들은 성을 지켜낼 수 있다는 희망에 사기가 한껏 올라갔습니다. 한편, 일본군은 전략이 먹혀들지 않자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방패를 앞세워 피해를 최소화한 후 그 뒤에서 조총병이 사격하는 동안 보병들이 접근하는 전략을 썼으나 이 역시 진주.. 2021. 12. 20.
[임진왜란52] 진주대첩(2) 계속되는 혈투 | 경상우병사 유숭인의 분투 10월 4일, 일본군 선발대 1만여 명이 진주성 인근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진주성을 공격하지 않고 진주성 외곽에서 성을 지원하던 경상우병사 유숭인의 군대를 공격하였습니다. 유숭인의 군대는 수백에 불과했기 때문에 병력의 차이가 너무나 현저했고, 모두 열심히 싸웠지만, 일본군의 본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유숭인 역시 휘하의 사천현감 정득열, 권관 주대청 등과 함께 전사했고, 진주성의 백성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사기가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진주성의 총책임자였던 진주목사 김시민은 성 밖의 아군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도와줄 수가 없었고, 이는 유숭인의 입성을 막았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10월 6일, 일본군 본대가 진주성에 도착.. 2021. 12. 18.
[임진왜란51] 진주대첩(1) 전운이 드리우는 진주성 9월 25일의 노현ㆍ창원성 전투를 모두 승리한 일본군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진출하는 관문인 진주성으로 향했습니다. 이 병력은 무려 3만이었으며, 그들을 이끄는 수장은 일본 제8군 선봉장이자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 그리고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군 전체의 총대장 역할을 수행하던 우키타 히데이에였습니다. 한편, 진주성은 병사한 진주목사 이경을 대신하여 김시민이 진주목사로 성을 지키고 있었으며, 앞서 사천ㆍ고성ㆍ진해의 적을 공격하여 무찌른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주성은 김시민의 병력 3,700과 곤양군수 이광악의 군사 100여 명을 합하여 3천 8백의 군사를 그느리고 있었으니 일본군의 군세에 비한다면 매우 열세인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진주성은 외성과 내성, 즉, 이중성벽으로 .. 2021. 12. 15.
조선의 비행기, 비차! https://youtu.be/OnbSC71wnoc 이번 시간에는 조선의 비행기 '비차'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때는 조선시대로, 전북 김제 출신의 정평구는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자, 무과로 전환하여 응시한 뒤 합격하여 무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정평구는 전라우수사 이억기(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함께 활약한 수군 장수)에게 발탁되어 진주병영 별군관으로 근무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진주목사 김시민의 휘하에서 화약을 다루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진주성 전투 때 비차(바람을 타고 비행할 수 있는 수레)를 만들어 고립된 진주성과 외부 사이에 연락을 취해 식량을 나르는 데 사용하였고, 신경준의 [여암전서]에는 왜군에게 포위되어 영남의 성에 갇혀 있던 성주를 비차.. 2021.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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