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1월 9일, 3차례의 탈환 시도 끝에 평양성을 되찾은 조명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1월 10일에는 개성까지 진격합니다.
고구려의 수도에 이어 고려의 수도까지!
한편, 평양성을 지키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4차 평양성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안전한 철수를 보장하는 협상을 맺고도 조명연합군의 추격을 받았으나 황해도에 진출해있던 일본 제3군 선봉장인 구로다 나가마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한양으로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양성 전투의 소식을 듣게 된 한양의 일본군은 명나라 군대의 대규모 참전과 압도적인 화력에 겁을 먹고 남쪽으로 후퇴하자는 의견이 대다수였으나 일본 제6군 선봉장이자 전라도 진출 임무를 실패했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여기서 더 이상 물러난다면 적군의 기세는 더 높아질 것이고 아군의 기세는 바닥을 칠 것이니 저들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
라고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일본군의 전라도 공격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물론, 일본군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의 철수 명령으로 고바야카와는 한양으로 물러나긴 했지만, 성에 들어가지 않고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의 장수와 함께 조명연합군과의 일전을 준비하였습니다.
여기서 고바야카와는 평양성에서 패전한 고니시 유키나가와 평양성 지원을 무시하고 도망친 오토모 요시무네의 병력을 배제시키고 4만 군사의 선봉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1월 25일,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진격하기에 앞서 명군 부총병 사대수, 조선군 장수 고언백을 보내 적정을 탐지하게 했으며, 일본군도 마찬가지로 정탐병을 보내면서 *여석령에서 정탐병끼리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 여석령 : 숯돌고개라고도 하며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에 위치해 있다.
사대수가 우리 장수 고언백과 함께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먼저 가서 정탐하던 중 경성의 서쪽에 이르렀을 때 적을 벽제역 남쪽 여석령에서 만나 1백여 급을 베었다.
제독(이여송)이 그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친병인 기병 1천여 명과 함께 달려가면서 대군을 계속 출동시키도록 명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이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이 일본군 1백여 명을 베며 승리하였으나 이는 일본군의 유인 작전이었고, 일본군은 진흙밭에 복병을 심어두고 명군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군 제독 이여송은 첫 교전에서의 승리 소식을 듣자 일본군을 가볍게 보았고, 곧이어 한양을 탈환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 오직 자신의 기병만을 이끌고 곧장 *혜음령을 넘어 *벽제관으로 진군하였습니다.
* 혜음령 : 고양시와 파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
* 벽제관 :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해있으며,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들어가기 하루 전 날 머물던 역관
다음 시간에 벽제관 전투에 대해 이어서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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