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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59] 과도한 자신감, 성급한 진격의 결과! 벽제관 전투(2)

by 역사채우기 2022.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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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5일, *여석령에서 벌어진 조명연합군의 정탐병이 일본군의 정탐병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전공을 세울 욕심에 자신의 기병만 이끌고 *벽제관으로 진군하였습니다.

여석령 : 숯돌고개라고도 하며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에 위치해 있다.
벽제관
 :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해있으며,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들어가기 하루 전 날 머물던 역관

 

벽제관 터(출처 : 문화재청)

 

 

그런데 벽제관은 비가 온 뒤라 땅이 진창이 되어 기병이 기동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고, 그 틈을 노려 매복해있던 일본군이 일제히 조총을 발사하였습니다.


마치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의 기마병이 늪지대에 빠진 것이 연상되는 장면입니다.

 

명군은 그제서야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아차렸으나 백병전에 강한 일본군 3개 부대에 포위된 후였고, 평양성에서 불랑기포를 발사하며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했던 명군 포병, 그리고 조선군은 멀리 있었기 때문에 고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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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관 전투에서 기습 당하는 명군(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전황은 명군에 점차 불리해져 자칫하면 이여송포로로 잡힐 뻔한 상황까지도 치닫게 되었으나 지휘사 이유승이 목숨을 걸고 활로를 열어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적이 먼저 많은 군사를 고개 뒤에 매복시키고는 단지 수백 명만 고개를 지키게 하여 약세를 보였다.
제독이 즉각 군사를 지휘하여 전진시키니, 적이 고개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군사들이 채 교전하기도 전에 적병이 갑자기 뒤에서 일어나 산 위에 진을 쳤는데 거의 1만여 명이 되었다.
명나라 군사는 단검에 기마뿐이었고 화기가 없었으며, 길이 험하고 진흙이 쌓였으므로 제대로 말을 달리지 못하였다.

이에 적이 긴 칼을 휘두르며 좌우에서 돌격해 들어오니 그 예봉을 대적할 수가 없었고, 제독의 휘하 이유승 및 용사 80여 명이 죽음을 당하였다.
이후 제독이 사대수에게 호위를 맡게 하고 길을 뚫고 빠져 나갔다.
[선조수정실록]

 

 

이여송이 후퇴한 뒤 명군 장수 부총병 양원이 각종 화기로 무장한 포병을 이끌고 벽제관에 도착했고, 일본군도 증원군이 도착하여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으나 명군의 계속된 포격으로 피해가 커진 일본군이 *혜음령을 넘지 못하고 철수하였습니다.

혜음령 : 고양시와 파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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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관 전투(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이렇게 벽제관 전투는 끝이 났고, 이 전투 이후 명군이 개성으로 후퇴하면서 조선군은 한양으로 진격하기 어려워진 반면, 일본군은 조명연합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게다가 일본군은 벽제관 전투를 이후에 다룰 칠천량 해전과 울산성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의 3대 전투로 기념하고 있으니 이 전투가 갖는 의미는 상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회본태합기에 묘사된 벽제관 전투



이후 류성룡은 명군에게 재출정을 주장했으나 앞선 전투에서의 패전으로 겁을 먹은 이여송은 일본군 공격에 매우 소극적으로 나서려 했으며, 북관대첩으로 정문부 장군에게 쫓긴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평양을 칠 것이라는 헛소문이 돌자 평양까지 퇴각하였습니다.

 

나(류성룡)는 힘써 간하기를 "이기고 지는 일은 병가에서 항상 있는 일입니다. 마땅히 형세를 보여서 다시 나아가셔야지 어찌 가볍게 움직이려 하십니까?"라고 하니, 이여송이 말하기를 "우리 군사는 어제 적을 많이 죽였으니 불리한 일은 없지만(?), 이곳은 비가 온 뒤 진창이 되어서 군사를 주둔시키기 불편하므로 군사를 뒤로 물려 휴식을 취한 후 진격하려 한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서울(한양)에 있는 적병의 군사만 20만(??)이니 적병은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서 대적할 수 없으며, 자신의 병이 심하니 다른 사람으로 임무를 대신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핑계를 늘어놓았습니다.
- 류성룡 [징비록]

 

 

정문부 장군의 북관대첩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89

 

[임진왜란47] 북관대첩(1) 함경도의 영웅 정문부

해정창 전투와 국경인의 반란으로 함경도 전역을 손에 넣은 가토 기요마사는 여진족을 공격했다가 피해만입고 부하들과 순왜들에게 북쪽 변경 지방을 지키게 한 후 자신은 안변으로 내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90

 

[임진왜란48] 북관대첩(2) 매국노 처단과 장덕산, 석성령 전투

| 국경인 처단 6진 중 하나인 종성진에서 순왜의 대표 인물인 국세필을 처단하고, 여진족의 침입까지 막은 정문부는 휘하의 의병을 이끌고 국경인이 있는 회령으로 진군했습니다. 이에 앞서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91

 

[임진왜란49] 북관대첩(3) 길주성 전투와 함경도 전역 탈환

국세필, 국경인, 정말수 등의 순왜 처단과 6진, 명천 지방을 회복하여 한창 기세를 드높이던 정문부와 의병들은 곧장 길주성으로 진군하여 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이후 정문부는 공성전을 전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이 무렵, 전라도 순찰사 권율독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남하하는 조명연합군과 합류하여 일본군을 앞뒤로 공격하기 위해 북상하여 벽제관에서 멀지 않은 행주산성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독산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96

 

[임진왜란54] 쌀로 말을 씻겨라! 독산성 전투

이치 전투의 승리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차단한 권율은 공을 인정받아 광주목사에서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치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

historicalhistory.tistory.com



하지만 벽제관 전투 이후 명군이 진격을 멈추니 조선군만으로는 남하를 할 수 없었고, 권율의 군대는 홀로 한양에 있는 수만 명의 일본군을 대적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다음 시간에 행주치마 권율의 행주대첩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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