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60] 행주대첩(1) 조그만 산성으로 몰려드는 초호화군단

by 역사채우기 2022. 1. 6.
반응형

1592년 12월,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경기도 오산의 독산성에서 승리한 후 북상을 지속했고, 1593년 1월에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기세를 이어 한양을 되찾기 위해 남하하였습니다.

 

독산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96

 

[임진왜란54] 쌀로 말을 씻겨라! 독산성 전투

이치 전투의 승리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차단한 권율은 공을 인정받아 광주목사에서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치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이후 권율은 전라도병사 선거이에게 4천 군사로 금천(서울특별시 금천구)을 지키게 했으며, 소모사 변이중에게 1천 군사로 양천(서울특별시 양천구)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 행주산성의 철벽 방어

그리고 김천일의 의병, 처영의 승병, 권율과 남은 관군을 합친 3천 병력은 조방장 조경의 의견에 따라 행주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행주산성은 남쪽과 서쪽에 한강이 흐르고, 동쪽에는 창릉천이 흘러 북쪽에서 오는 공격에 집중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며, 내성과 외성, 즉, 이중 성벽의 형태를 가진 성이었습니다.

행주산성 인근 지도(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하지만 산성인 데 비해 높이가 낮았고(약 120m), 성벽도 낮았기 때문에 조경은 성의 내성인 석성과 외성인 토성에 목책을 2중으로 설치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습니다.

또한, 권율은 주요 요충지에 변이중 화차와 신기전, 제2차 경주성 전투에서 활약한 비격진천뢰,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보내준 천자총통을 비롯한 온갖 신무기를 배치했고, 흙으로 제방을 쌓아 조총의 탄환을 피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변이중 화차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의 변이중 화차 부분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31

 

조선의 대량살상무기! 화차

https://youtu.be/d3QZ46JNqqg 이번 시간에는 조선의 대량살상무기 '화차'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1377년, 최무선의 화약 개발을 시작으로 화통도감(화약 및 화기 제조를 담당하던 관청)이 설치되어

historicalhistory.tistory.com

 

 

비격진천뢰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반응형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83

 

[임진왜란41] 거북선의 뒤를 이을 비장의 무기 비격진천뢰! 제2차 경주성 전투

8월 20일, 경상좌병사 박진은 1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경주성 탈환을 시도했으나 매복해있던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600여 명의 전사자를 내며 후퇴하였습니다. 하지만 박진은 포기하지 않

historicalhistory.tistory.com

 


그뿐만 아니라 병사들에게 재를 담은 주머니를 허리에 차게 하여 병력의 부족을 커버하는 동시에 방어력을 극대화하였습니다.



하지만 1월 27일, 조명연합군의 수장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자신의 기병만 이끌고 성급히 진군하다 벽제관에서 패배한 후 개성으로 퇴각하니 일본군을 앞뒤로 공격하기 위해 북상 중이던 권율은 자력으로 한양에 주둔한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벽제관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00

 

[임진왜란58] 기세를 타고 한양으로! 벽제관 전투(1)

1593년 1월 9일, 3차례의 탈환 시도 끝에 평양성을 되찾은 조명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1월 10일에는 개성까지 진격합니다. 고구려의 수도에 이어 고려의 수도까지! 한편, 평양성을 지키던 고니시 유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01

 

[임진왜란59] 과도한 자신감, 성급한 진격의 결과! 벽제관 전투(2)

1월 25일, *여석령에서 벌어진 조명연합군의 정탐병이 일본군의 정탐병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전공을 세울 욕심에 자신의 기병만 이끌고 *벽제관으로 진군하였습니다. * 

historicalhistory.tistory.com

 


그래도 양주에 경기 방어사 고언백이, 파주에 도원수 김명원, 순변사 이빈, 명나라 부총병 사대수의 조명연합군 일부가 주둔했고, 통진(김포시)은 충청감사 허욱이 지키고 있어 한양에 위치한 일본군의 배후를 곳곳에서 압박했으나 이후 일본군의 행보를 보면 큰 위협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 행주산성으로 몰려드는 일본군

이 무렵, 일본군 수뇌부는 다른 곳은 제쳐두고 3만의 군사를 7진으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공격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그 군대의 1진은 1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 2진은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대장 격 인물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 3진은 3군 선봉장 구로다 나가마사, 4진은 8군 선봉장이자 일본군 총사령관이었으나 얼마 전 독산성 전투에서 권율에게 패했던 우키타 히데이에였습니다.

이어서 5진은 깃카와 히로이에, 6진은 7군 선봉장 모리 데루모토의 양자 모리 히데모토, 7진은 6군 선봉장이자 이치 전투에서 권율에게 패했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각각 군을 이끌었으니 함경도에서 정문부 장군과 싸우다 후퇴 중이던 가토 기요마사(북관대첩)와 남쪽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과 대치하던 일본 수군을 제외한 임진왜란의 내로라하는 일본군 장수가 총출동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행주산성으로 몰려드는 일본군(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2월 12일 묘시(오전 5시~7시)에 일본 기병 100여 명이 행주산성에 모습을 드러낸 데 이어 그 뒤로 수많은 군사의 행렬이 뒤따랐습니다.

그들의 선봉은 1진의 고니시 유키나가였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앞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제4차 평양성 전투에서 패한 후 벽제관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난 날의 패전을 되갚아줄 절호의 기회라 여기며 성에 조금씩 다가갔습니다.

 

제4차 평양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98

 

[임진왜란56] 제4차 평양성 전투(2) 막다른 길에 몰린 일본군의 최후는?

맹렬한 화포 공격으로 평양성의 외성을 함락시킨 조명연합군은 물밀듯이 중성으로 치고들어갔고, 일본군은 계속 밀려나 풍월정에 토굴을 쌓아 올려 결사항전하였습니다. 조명연합군의 총지

historicalhistory.tistory.com

 



다음 시간에 행주대첩에 대해 이어서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