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55] 조명연합군의 집중 포화! 제4차 평양성 전투(1)

by 역사채우기 2021. 12. 26.
반응형

임진왜란 초반, 물밀 듯이 진군해오는 일본군에 의해 의주까지 밀려난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에 명나라는 자국의 국경까지 위협을 받자 요동 부총병 조승훈을 원군으로 파병하였습니다.

선조의 의주 피난과 평양성을 점령한 고니시

 


그러나 도원수 김명원과 요동 부총병 조승훈의 조명연합군은 평양성 탈환에 실패하였고, 조승훈은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요동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제2차 평양성 전투)

 

제2차 평양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4

 

[임진왜란32] 조명연합군의 첫 전투! 제2차 평양성 전투

|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 실패 육지에서는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가 전라도 점령에 실패했고, 바다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한산도에서,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가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이후 시간이 흘러 명나라는 내부 반란을 진압하고 정국이 안정되자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에게 4만 3천의 군사를 보내 조선을 구원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번에 파병된 명나라 군대는 1차에 비해 규모가 훨씬 커졌고, 불랑기포 등의 화약 무기까지 다수 보유하고 있어 조선과 합세한다면 일본군에 비해 화력과 병력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불랑기포(출처 : ko.wikipedia.org)



12월 13일, 명나라의 선봉 부대가 압록강을 건넜고, 12월 25일에는 이여송의 본대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다시 한번 평양성을 탈환하기로 계획하였고, 조선에서도 도체찰사 류성룡, 도원수 김명원, 경상도 순변사 이일이 이끄는 관군 8천여 명,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병 2,200여 명도 함께 참전하였습니다.

도체찰사 류성룡

 


이렇게 5만이 넘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황해도 봉산에 5천 군사와 주둔해있던 일본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 휘하의 오토모 요시무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오토모는 그 길로 한양으로 철수해버렸습니다.

오토모 요시무네



그러자 고니시는 어쩔 수 없이 평양성을 자력으로 막을 수밖에 없어 평양성의 방어 시설을 확충하고, 모란봉에 2천 명의 조총수를 배치하는 등 방비에 총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이 어느덧 해를 넘겨 1593년이 되었고, 1월 6일, 평양성 앞에 다다른 조명연합군이 성을 완전히 포위한 후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평양성의 4중 성벽(출처 : kbs 역사스페셜)


조명연합군은 제독 이여송이 총지휘하였고, 명나라 장수 오유충과 서산대사, 사명대사의 승병은 모란봉을, 이여송은 칠성문을, 양호는 보통문을, 부총병 조승훈과 낙상지, 이일과 김응서는 함구문을 각각 공격하였습니다.

이어 이여송은 후퇴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며, 가장 먼저 성에 오르는 자에게 은 50냥을 내리겠다며 사기를 올렸습니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명나라 부총병 오유충과 조선의 사명대사와 서산대사가 이끄는 승병은 모란봉을 공격하다가 거짓으로 패한 척 후퇴하다가 일본군이 추격해올 때를 기다려 역습을 가해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러나 함구문을 공격하던 조선군은 매복해있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다음 날(1월 7일) 새벽, 일본군 3천여 명이 어둠을 틈타 명나라의 좌군 진영에 기습을 가했으나 명군이 잘 막아냈고, 조명연합군은 기병을 이용해 일본군을 유인했으나 응하지 않았습니다.


1월 8일, 명나라 군이 위원포, 자모포, 연주포, 불랑기포 등의 대포로 평양성에 집중 포화를 가한 후 조명연합군이 성벽에 기어오르면서 양측은 치열한 사투를 벌였습니다.

반응형

0
불랑기포의 포화(드라마 임진왜란1592 중에서)



그러는 와중에 오유충은 총상을 입고도 분전했으며, 제독 이여송은 타고 있던 말이 탄환에 맞아 죽었음에도 다른 말로 갈아타 군사들을 끝까지 지휘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병사들 뿐만아니라 지휘관들도 전장의 최전방에서 직접 전투를 독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밀려드는 물량 공세에 점점 후퇴하였고, 평양성의 외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아래는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 수록된 제4차 평양성 전투에 대한 내용입니다.

 

다음 날 아침 명나라 군대는 진격하여 평양성을 포위하고 보통문, 칠성문을 공격하였다.
적은 성 위에 올라 붉고 흰 깃발을 줄지어 세우고 항전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대포와 불화살로 적을 공격하니 대포 소리가 땅을 울려서 수십 리 안의 산이 모두 흔들렸다.
낙상지, 오유충 등의 명나라 장수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개미처럼 성을 붙어 오르는데 앞사람이 떨어지면 뒷사람이 올라가니 후퇴하는 병사가 없었다.

적의 칼과 창이 성벽 위에서 아래를 향하여 나와있는 모습이 마치 고슴도치의 바늘 같았다.
명나라 군대가 더욱더 분투하니 적은 버티지 못하고 내성으로 달아났다.
칼로 베고 불로 태워 죽인 병사가 매우 많았다.
류성룡 [징비록]

 



다음 시간에 제4차 평양성 전투에 대해 이어서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