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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56] 제4차 평양성 전투(2) 막다른 길에 몰린 일본군의 최후는?

by 역사채우기 202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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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한 화포 공격으로 평양성의 외성을 함락시킨 조명연합군은 물밀듯이 중성으로 치고들어갔고, 일본군은 계속 밀려나 풍월정에 토굴을 쌓아 올려 결사항전하였습니다.

조명연합군의 총지휘관이자 명나라 제독인 이여송은 이곳을 집중공격했지만 일본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막혀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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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탈환도(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그러자 이여송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협상을 했고, 고니시는 계속 방어하다간 죽거나 포로로 잡힐 것을 염려하여 협상에 응했습니다.

협상의 내용은 일본군이 평양성에서 물러나는 대신 조명연합군이 이들을 추격하지 않고 안전하게 보내줄 것을 보장하고 평양성의 포위를 풀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군은 협상의 소식을 듣고 격분했으며,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임진왜란의 일본 제1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를 잡고 싶었으나 지휘권이 명나라에 있는지라 이여송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래는 도체찰사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에 수록된 명군과 일본군의 협상 이후의 상황이며, 고니시 유키나가를 잡지 못한 아쉬움과 한이 담겨 있습니다.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밤마다 달아나 한양으로 돌아갔다.
기력은 쇠하고 발은 부르터서 절뚝거리며 갔다.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 하나 나서서 그들을 공격하려 들지 않았고 명나라 군대도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만약 고니시, 소오, 겐소 등을 잡았다면 한양의 적은 스스로 무너졌을 터이고, 한양의 적이 무너지면 가토 기요마사는 돌아오는 길을 차단당했을 터이니(북관대첩) 적병들은 두려워하여 바닷길을 따라 달아났겠지만 빠져나가지 못하였을 터이고 한강 이남의 적진들이 차례로 와해되었을 것이다.

그러하였다면 명나라 군대는 북을 치며 천천히 나아가 곧장 부산에 도착하여 실컷 술만 마셨어도 되었을 것이고 순식간에 우리나라는 깨끗해졌을 것이니, 어찌 몇 년 동안의 어지러움이 있었겠는가.
류성룡 [징비록]

 


하지만 협상을 하긴 했어도 조명연합군은 거물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긴 아쉬웠는지 명군 참장 이녕이 3천의 군사를 추격조로 편성했고, 조선군 역시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과 황주 판관 정화 등이 군사를 이끌고 뒤늦게 추격에 나섰습니다.

[회본태합기]에 나오는 제4차 평양성 전투



그 결과, 명군이 358명을 사살하고, 조선군이 180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고니시 유키나가와 겐소(고니시의 책사), 소오 요시토시(대마도주이자 고니시의 사위) 등은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조명연합군은 1592년에 6월에 평양성을 빼앗긴 후 3차례에 걸친 공방전 끝에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했으며, 고니시는 부산에 상륙할 당시 18,700명의 군사를 이끌었으나 이 전투 이후 한양에 도착했을 때는 6,600명으로 크게 줄어있었습니다.

 

 

제1차, 2차, 3차 평양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61

 

[임진왜란19] 제1차 평양성 전투

한양에 제일 먼저 입성하고, 이어서 평안도로 북상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 제1군은 어느덧 평양 인근에 다다랐습니다. 하지만 평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대동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한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4

 

[임진왜란32] 조명연합군의 첫 전투! 제2차 평양성 전투

|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 실패 육지에서는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가 전라도 점령에 실패했고, 바다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한산도에서,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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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5

 

[임진왜란33] 조선의 힘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라! 제3차 평양성 전투

조선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일본군을 모두 막아내면서 전라도 수호에 성공하였고, 요동 부총병 조승훈의 명나라 지원군까지 왔으니 이번 기회에 조선 조정은 평양성을 탈환하여 전황을 완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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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는 부산에 상륙한 이후 부산진성 전투, 다대포성 전투, 동래성 전투, 상주 전투, 충주 탄금대 전투, 제1차, 2차, 3차 평양성 전투 등 임진왜란 초기의 굵직한 전투를 모두 승리하며 평양까지 북상했으나 병력의 손실은 크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의 주요 전장 지도

 


그러니 제4차 평양성 전투가 고니시에게 얼마나 뼈아픈 패배였는지 어렵지 않게 실감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성주성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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