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초반, 고니시의 1군에 의해 성주가 함락된 이후 성주는 하시바 히데카츠의 9군이 점령중이었다가 일본 제7군 모리 데루모토 휘하 장수인 가쓰라 모토쓰나의 1만 병력이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권응수 장군이 영천성을 탈환하였고, 이어서 경상좌병사 박진이 비격진천뢰를 앞세워 경주성을 탈환하면서 인근의 일본군 중 일부가 성주로 옮겨가 성주에는 2만여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권응수 장군의 영천성 전투와 경상좌병사 박진의 1ㆍ2차 경주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영천성 전투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9
1차 경주성 전투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82
2차 경주성 전투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83
이에 조선군은 불어나는 일본군의 규모를 두고볼 수만은 없었고, 이들의 보급로를 끊어 고립시키기 위해 운봉현감 남간, 구례현감 이춘원의 관군 5천여 명과 영천성 탈환에 공이 컸던 김면, 정인홍, 정사제 등의 의병장이 주축이 되어 총 2만 5천에 달하는 병력을 규합하였습니다.
8월 19일, 조선군은 성주성을 포위한 후 공격하려 했으나 미처 포위망을 형성하기도 전에 개령(김천시 개령면)에 있던 모리 데루모토가 부장 요시미에게 군사를 주어 성주성을 지원하였고, 그들이 의병 부대의 후방을 급습하였습니다.
그러자 조선군은 혼란에 빠져 대열이 무너져버렸고, 그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성주성 1차 공격에서 패배한 조선군은 9월 11일, 2차 공격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후방에서 일본군이 지원군을 이끌고 나타났고, 성주성의 일본군도 성문을 박차고 나와 조선군을 협공하니 별장 손승의 등이 전사하면서 큰 피해를 입고 또 다시 물러났습니다.
이때 의병들끼리의 연합작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각개격파 당한 것이 패전의 원인이라 생각한 정사제는 위험을 무릅쓰고 의주에 있는 선조에게 직접 찾아가 '진창의토벌사소'라는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이후 정사제는 분의사로 임명되었고, 10월 29일, 성주성 3차 공격을 계획합니다.
11월 7일, 정사제의 의병이 매복 공격으로 일정 성과를 거두었고, 14일에 성주성을 총공격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전라좌의병부장 장윤의 의병 부대가 선봉에 서서 용맹을 떨쳐 200여 명의 일본군을 베고 400명의 포로를 구해냈으며, 의병도대장 김면이 군율을 엄정히 다루어 군대의 위용이 지극히 장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끝내 성을 탈환하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이렇게 3차례에 걸친 공방전은 모두 조선군이 패배하였으나 일본군도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고 뒤이을 조선군의 계속된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해를 넘겨 1월 15일, 성주성에서 완전히 철수하여 개령에 있는 본대와 합류하였습니다.
결국 조선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성주성 탈환이라는 목표를 달성했고, 대구에서 조령을 잇는 일본군의 주요 보급로를 끊는 성과도 얻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벽제관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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