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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68] 제2차 진주성 전투(3) 처절한 항쟁

by 역사채우기 2022.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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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1일, 일본군 기병 200여 명이 진주성 동쪽에 모습을 드러내 정찰하였고, 뒤이어 일본군 부대가 공격하기에 앞서 진주성 주변의 해자를 메웠습니다.

해자를 건너는 적군(드라마 대조영 중에서)

 


당시 진주성의 조선군은 6천으로 9만 3천에 달하는 일본군에 대항하여 성을 방비할 병력조차도 부족했기 때문에 일본군이 해자를 메우고 공격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고도 감히 나서지 못했습니다.


6월 22일 아침, 일본군이 진주성 공격을 개시했으나 조선군의 공격으로 일본군 30여 명이 죽자 잠시 물러났다가 밤에 2차례 공격을 해왔으나 순성장 황진(충청병사)을 비롯한 조선군 지휘관들의 활약으로 모두 물리쳤습니다.

충청병사 황진



6월 23일, 해자를 메운 일본군은 각종 공성 무기와 수적 우세를 앞세워 낮에 3차례, 밤에 4차례 공격해왔으나 모두 격퇴하였습니다.


6월 24일에는 전날의 거센 공격으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6월 25일, 진주성 동문 밖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후 그곳에 공성 무기를 세워 성을 내려다보며 사격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이에 황진이 진주성에도 언덕을 만들어 그곳에서 현자총통을 쏘아 공성 무기를 맞히면서 일본군의 전략을 무력화시켰으며, 23일과 같이 낮에 3차례, 밤에 4차례 공격해왔으나 모두 격퇴하였습니다.

현자총통(출처 : 위키백과)



6월 26일, 일본군은 방책을 만들어 성 위에서의 공격을 막으면서 성으로 접근하였지만, 성에서 바위와 나무를 굴리면서 모두 막아냈고, 동문 쪽에서는 일본군이 화공을 전개하니 성 안의 민가가 다수 불타버리는 모습을 보고 진주목사 서예원은 겁을 집어먹고 전투에 제대로 임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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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을 공격하는 가토 기요마사



그러자 창의사 김천일은 사천현감 장윤이 임무를 대신하게 하였고, 이후 일본군이 항복을 요구해왔으나 조선군은 단칼에 거절하였습니다.

 
6월 27일, 일본군이 동문과 서문 밖의 여러 곳에 언덕을 만든 후 누각을 세워 사격전을 시도하자 조선군 300여 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고, 이어서 귀갑차와 철제 공성추를 이끌고 성문 돌파를 시도했으나 김해부사 이종인이 기름과 횃불을 던져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귀갑차를 사용하는 일본군



6월 28일, 북쪽 성곽 방비를 담당하던 서예원의 경계 소홀을 틈타 일본군이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접근해오면서 시작된 전투는 온종일 지속되었고, 가까스로 방어는 했으나 조선군의 피해도 점점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투가 끝난 후 황진이 전장을 돌아보다가 시체 속에 숨어있던 일본군에게 저격당하면서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고, 지금까지 가장 활약했던 황진의 죽음으로 진주성 군민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다음날 적이 또 동쪽과 북쪽의 성을 침범하여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종인이 다시 크게 싸워 물리쳤다.
황진이 순행차 이곳에 이르렀다 성 아래를 굽어보고 말하기를, "적의 시체가 참호에 가득하니 죽은 자가 거의 1천여 명은 되겠다"하였다.

그런데 이때 적 한 명이 성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위를 향해 철환을 쏘았는데, 판순을 뚫고 황진이 이마에 맞아 즉사하였다.
황진은 용략이 여러 장수 가운데 으뜸이었으므로 성 안에서 그를 의지하였는데 그가 죽자 성안이 흉흉해지며 두려워하였다.

[선조수정실록]

 


6월 29일, 죽은 황진을 대신해 서예원을 순성장으로 삼았지만, 서예원은 여전히 겁을 먹고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자 경상우병사 최경회는 서예원을 죽이려 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장윤을 순성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장윤은 얼마 못 가 조총에 맞아 죽고 말았고, 폭우가 내리면서 동문이 무너지자 일본군이 성 안으로 진입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김해부사 이종인이 막아냈지만, 북문 쪽에서 귀갑차를 이끈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면서 진주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이렇게 성이 함락되자 남은 조선군은 남강 부근의 촉석루까지 밀리면서 저항을 지속했지만, 대세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복수의병장 고종후 등은 북향사배를 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면서 생을 마감했고, 김해부사 이종인은 적병 둘을 껴안고 강에 뛰어들어 전사하였습니다.

진주 남강과 촉석루(출처 : 위키백과)

 

 

남평 사람 이종인은 황진과 함께 무과에 급제한 용장으로 가장 먼저 진주성에 들어갔고 종횡무진하며 진주성을 지켰다.
그는 마지막에 죽을 때도 양 겨드랑이에 왜적 두 사람을 끼고서 "김해부사 이종인, 여기에서 죽는다"라고 외치며 남강에 뛰어들었다.
[호남절의록]

이종인이 투신하는 장면(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중에서)

 

 



다음 시간에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한 이유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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