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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70] 논개의 희생과 송유진의 난

by 역사채우기 2022.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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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 함락 이후

한편, 진주성 함락 이후 진주목사 서예원은 비참한 죽임을 당했고, 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졌습니다.

일본군은 진주대첩 때 김시민이 전사하지 않았고,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도 직접 지휘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서예원''김시민'으로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진주목사 서예원(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중에서)



7월 13일, 조선 조정은 도원수 권율과 명나라 군대로 하여금 진주성 구원을 지시했지만 이미 진주성은 함락된 지 열흘이 넘은 때였습니다.


이 무렵, 진주성 함락에 도취되어 술판을 벌이던 일본군은 기생을 불렀고, 그중 한 명이 왜장을 촉석루의 절벽으로 유인한 후 왜장을 끌어안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그녀가 바로 '논개'입니다.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죽은 자리(의암)(출처 : 위키백과)

 

 

진주성이 함락되자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서 있었으니 아래는 만길 낭떠러지였다.
사람의 혼이라도 삼킬 듯 파도가 넘실거렸다.

왜병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왜장 하나가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논개는 요염한 웃음을 흘리면서 왜장을 맞았다.

왜장의 손이 그녀의 연약한 몸을 잡자 논개는 왜장을 힘껏 끌어안는가 싶더니, 마침내 몸을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두 사람은 모두 익사했다.

 - 유몽인 [어우야담]

진주성 촉석루(출처 : 위키백과)



 

논개의 출신에 관해서는 경상우병사 최경회의 후처라는 설과 진주의 기생이라는 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논개(출처 : 위키백과)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번영로 [논개]

 


이후 일본군은 남원과 구례 방면으로 공격을 가해왔으나 이내 물러갔으며, 더이상 공격해오지 않았습니다.

일본군(고니시)은 앞서 진주성만 노리고 있으니 성만 비워둔다면 더는 진격해오지 않을 것이라 알렸던 것을 이행한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진주성에서의 피해가 워낙 컸기 때문에 공격해오고 싶어도 못 오는 상황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 송유진의 난

송유진은 서울 건천동 출신이었으나 천안, 직산 등을 자주 왕래했으며, 학식이 뛰어났으나 서얼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분적 한계로 자주 왕래하던 천안 부근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1593년에 수도 한양을 탈환했으나 인근의 수비가 소홀한 것을 알고는 송유진이 천안ㆍ직산의 굶주린 백성들을 모아 2천이나 되는 세력을 이끌고 스스로를 의병대장이라 칭하며 난을 일으켰습니다.

송유진(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1594년 1월 3일, 송유진은 반란군을 이끌고 아산현에 있는 임희지의 집을 습격하여 소와 말, 식량 등을 약탈하였고, 1월 10일에는 아산과 평택의 무기고에서 군량미와 무기를 마련하였습니다.

1월 11일,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는 충청병사 변양준과 순변사 이일에게 난의 진압을 지시하였습니다.

순변사 이일(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그런데 1월 12일, 송유진의 난에 가담했던 홍각이 친척이었던 김응용에게 회유되었고, 홍각은 송유진을 자신의 집으로 유인한 뒤 체포하였습니다.


1월 25일에는 송유진과 난에 가담한 주모자 송유진, 오원종, 김천수 등에게 도성을 포위한 뒤 광해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는 혐의로 *능지형을 집행했으며, 1월 27일에는 반란이 평정되었음을 종묘사직에 고하고 주모자를 제외한 나머지 가담자들은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 능지형 :  산 채로 살을 회뜨는 형벌로 능지처참이라고도 함



하지만 이 과정에서 충남 보령의 의병장이었던 이산겸이 송유진의 난에 가담했다는 잘못된 보고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고 옥사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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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이산겸이 역적의 무고로 체포되어 하옥되었다.
역적과 대질한 결과 역적의 말이 꿀렸는데도 이산겸은 오래도록 구금된 채 풀려나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산겸이 의병을 장악하고 해체하지 않은 그 정상이 의심스럽다."
하여, 마침내 형추하도록 명함으로써 형장 아래에서 죽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원통하게 여겼다.

[선조수정실록]

 


이후 조정에서는 이번 사건의 원인이 전란으로 인한 빈곤, 기근, 그리고 높은 세금, 잦은 공역에 동원된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조세를 경감하고, 백성들을 구휼하는 정책을 폈으나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제2차 당항포 해전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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