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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69]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

by 역사채우기 2022.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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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공불락 진주성의 함락

제2차 진주성 전투는 6천의 관군과 의병이 9만 3천의 일본군을 맞아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9일 동안 격전을 펼쳤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진주성을 공격하는 가토 기요마사



당시 상황은 행주대첩과 웅포해전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데 이어 의병 활동으로 보급로가 계속 차단이 되자 일본군은 한양을 버리고 경상도 남해안 방면까지 밀린 상황에서 명나라와의 강화 회담 중이었음에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그리고 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에서 대패했던 것을 설욕하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력한 지시 때문에 일어났던 이 전투의 결과는 매우 참혹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을 함락시키면 진주성 내의 사람은 물론이고 개나 고양이 할 것 없이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라고 지시한 바 있었기 때문에 진주성에 있던 백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일본군의 손에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 수가 조선 측 주장으로는 6만 명이었다고 하며, 일본 측 기록으로도 2만이 넘는 수급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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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함락된 이후(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한편, 9일 동안 진주성 하나만 노려보고 공세를 취한 일본군의 피해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조선군의 피해 이상으로 피해가 컸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성안의 사녀들도 앞을 다퉈 강에 이르러 투신자살하여 흐르는 시체가 강을 메웠다.
대략 죽은 자가 6, 7만이나 되었는데, 장사로서 벗어난 자는 수삼 인에 불과했다.
적이 성곽을 헐고 가옥을 불태웠으므로 성이 온통 폐허가 되었다.

성이 포위를 당한 9일 동안은 주야로 벌인 크고 작은 전투가 1백여 차례나 되었으며, 적의 죽은 자도 상당하였다.
왜변이 있은 이래 참혹하게 무너지고 의열이 장엄하게 드러난 것으로 진주성 같은 예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한 이유

조선군이 진주성을 지켜내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첫 번째로, 병력의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조선군은 6천인 데 반해, 일본군은 이순신의 수군과 대치하는 일부의 수군과 조명연합군을 방어하는 일부 병력을 제외한 모든 병력을 진주성에 집결시켰기 때문에 9만 3천에 달하는 대군을 보유할 수 있었습니다.

진주성 공격을 위해 투입된 일본의 대군(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게다가 일본군은 병력의 우세함을 앞세워 군대를 여러 조로 나눈 후 하루에도 여러 차례 공격할 수 있었지만, 조선군은 성을 방어할 병력조차도 부족한 상황에서 계속된 공격을 쉼 없이 막아내야 했습니다.


두 번째는 외부에서 지원해주는 세력이 없었고, 고립무원인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예견된 전투였기 때문에 진주성의 위급함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나 명나라 제독 이여송, 도원수 권율, 전라병사 선거이 등의 인물이 진주성 입성을 포기하였고, 특히 홍의장군 곽재우

 

'죽을지언정 진주성에 입성하여 노련한 병사들을 잃을 수는 없다'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홍의장군 곽재우



그랬기 때문에 전투가 지속된 이후 조선군은 대군을 맞아 잘 싸웠음에도 전황은 점차 불리해졌고, 결국에는 모두가 죽는 비극으로 끝난 것입니다.

만약 앞서 말한 이들이 성의 외곽에서 진주성을 지원했다면 이 전투의 향방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황진의 죽음입니다.

황진은 충청병사이자 겁먹은 서예원(진주목사)를 대신한 수성장으로써 전투 내내 가장 큰 공을 세웠으나 시체 더미 속에 숨어있던 일본군의 저격으로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조선군의 사기가 크게 꺾이고 말았고, 그다음 날 진주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충청병사 황진



후에 황진의 죽음을 알게 된 이순신

 

"황진이 죽었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됐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황진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진주성 함락 이후의 상황과 송유진의 난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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