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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86] 남원성 전투(1) 사나이 국은을 갚을 때가 이 날이 아닌가!

by 역사채우기 2022.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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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의 전라도 재침공 계획

지난 임진년(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개전 초반, 일본군이 승승장구하며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진출하였으나 결정적 승리를 얻지 못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결국에는 남쪽으로 밀려난 원인이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물리치지 못해 보급에 차질을 빚었던 것과 곡창지대였던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데 있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후 1597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라도 침략을 지시하였습니다. (정유재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에 일본군은 14만의 병력을 좌군과 우군, 이렇게 둘로 나누어 우군은 총사령관을 모리 히데모토로 삼고, 임진왜란 때 2군과 3군 선봉장을 맡았던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을 포함하여 총병력 73,700명이 편성되었습니다.

이들은 밀양, 합천, 황석산성(경남 함양)을 거쳐 전라도로 진군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좌군은 총사령관을 우키다 히데이에로 삼고, 임진왜란 때 1군과 5군 선봉장을 맡았던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육군과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등의 수군까지 합세하여 총병력 5만 6천이 편성되었습니다.

이들은 구례, 남원을 거쳐 전라도를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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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좌군과 우군의 진군로(출처 : 역사저널 그날)



 


|  4천  vs  5만 6천?

8월 7일, 일본군 좌군이 구례현감 이희춘의 군대를 물리치고 구례를 점령한 후 남원으로 진군하였습니다.

여기서 남원은 경상도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전라도로 진입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전라도 방어를 위해서 꼭 지켜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이지만 당시 남원성에는 7천 명의 백성과 부총병 양원이 이끄는 3천의 명나라군, 그리고 남원부사 임현을 비롯한 소수의 조선군이 지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었을 때 명나라는 남원이 일본군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될 것을 예상했기에 미리 군사를 배치함으로써 3천의 군사라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의 남원 진군이 임박하자 주변 사람들이 부총병 양원에게 평지인 남원성보다는 험준한 지형을 끼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교룡산성에서 항전할 것을 요청했으나 양원은 이를 무시하고 남원성 외곽에 참호를 파고 중요 요소에 병력을 배치하며 성의 방비에 힘썼습니다.

교룡산성(출처 : 문화재청)



같은 날, 구례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구례현감 이희춘이 남원성으로 들어와 적군의 상황을 전했고, 소식을 들은 부총병 양원은 군사를 모으기 위해 2천의 병력을 이끌고 전주에 주둔해 있던 명나라 유격장군 진우충과 전주부윤 박경신에게, 그리고 순천에서 3천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전라병사 이복남에게 남원성 지원을 요청하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 이복남은 임진년 때 있었던 웅치안덕원 전투에서 충청병사(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 장군과 분전하여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막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바 있습니다.

 

웅치 전투안덕원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62

 

[임진왜란20]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아라! 웅치 전투

일본 제6군을 이끌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조선을 분할통치하자는 계획에 따라 전라도로 진출하려 하였으나 곽재우의 의병에게 정암진에서 패배하여 성주로 퇴각하면서 잠시 계획을 보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63

 

[임진왜란21] 웅치의 조선군은 아직 죽지 않았다! 안덕원 전투

7월 7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 제6군은 웅치에서 의병장 황박과 오정달의 제 1방어선과 나주 판관 이복남의 제 2방어선, 그리고 김제 군수 정담의 최후방어선까지 혈전 끝에 무너뜨리

historicalhistory.tistory.com

 


그런데 이들이 휘하의 군사를 모두 모아서 남원성으로 오더라도 조명연합군의 총병력은 1만이 채 안 되었기 때문에 일본 좌군의 5만 6천에 비한다면 매우 열세였지만 백성들과 힘을 합쳐 사력을 다해 막는다면 일말의 희망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주에 있던 진우충과 박경신은 전주성을 비울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남원성 지원 요청을 거부하였고, 이복남은 위의 요청에 응해 남원으로 향하던 중 군사 대부분이 도망치면서 휘하의 군사는 50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복남은 남원성을 지키려는 굳은 결심으로 남원으로 발길을 재촉했고, 이 과정에서 조방장 김경로, 광양현감 이춘원, 방어사 오응정, 교룡산성수어사 신호의 군대와 합류하면서 1천여 명의 병력을 확보하였습니다.

* 교룡산성수어사 신호는 낙안군수 시절,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한 바 있던 장군입니다.

 


8월 12일, 이들은 남원성 외곽에 도착했으나 문제는 일본 좌군의 5만 6천 병력도 남원성 외곽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성 내부로 입성하기 매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남원성에 있던 양원과 남원부사 임현도 기껏 기다리던 지원군이 들어오지도 못하고 몰살당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으나 전라병사 이복남

 

사나이 국은을 갚을 때가 이 날이 아닌가!

 

라고 결의한 후 북을 치며 너무도 당당하게 일본군의 진 사이를 지나 남원성으로 들어가면서 이들의 우려를 모두 불식시켰습니다.

남원성으로 입성하는 전라병사 이복남 장군(출처 : 문화재청)

 


그러자 이복남의 당돌함에 당황한 일본군은 조선인 포로에게 "저 자는 누구인가?"라고 묻자 "전라병사 이 아무개이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복남과 군사 1천여 명이 남원성으로 무사히 입성하자 양원은 이들에게 남원성 북문의 수비를 맡겼고, 동문은 명군의 중군 이신방이, 서문은 명군 천총 모승선이, 남문은 명군 천총 장표가 각각 수비를 담당하였습니다.

 

 

 

다음 시간에 남원성 전투에 대해 이어서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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