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108] 순천 왜교성 전투(1) 사로병진책의 마지막 작전?

by 역사채우기 2022. 8. 28.
반응형

명나라 경략 형개의 사로병진 작전이 전개된 이후 조명연합군은 명나라 제독 마귀, 조선의 선거이김응서가 이끈(동로군) 2차 울산성 전투, 그리고 명나라 제독 동일원과 조선의 정기룡이 지휘한 사천왜성 전투(중로군)마저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함으로써 전황은 조명연합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로병진책

 

 

2차 울산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47

 

[임진왜란105] 임진왜란의 원흉! 가토의 목을 취하라! 제2차 울산성 전투

1597년 12월 23일에서 1598년 1월 4일까지 열흘에 걸친 1차 울산성 전투에서 명나라 경리 양호와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은 성의 수장이자 임진왜란의 원흉인 가토 기요마사의 목을 취하는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사천왜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48

 

[임진왜란106] 사천왜성전투(1)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를 잡아라!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사로병진책 1598년 8월에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까지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조선에 있던 일본군은 *오대로와 *오봉행의 지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49

 

[임진왜란107] 사천왜성전투(2) 불의의 사고와 엇갈린 희비

명나라 제독 동일원과 조선의 경상우병사 정기룡이 이끄는 4만 대군은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를 공격하기 전, 그들의 방어 전진기지였던 망진왜성, 영춘왜성, 그리고 사천읍성(사천구성)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이제 남은 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명나라 도독 진린이 이끄는 수로군, 명나라 제독 유정, 조선의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서로군만이 고니시 유키나가가 농성 중인 순천 왜교성을 목표로 진군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규모는 육군(서로군)이 3만 6천, 수군(수로군)이 1만 5천에 달하여 이들을 합치면 5만이 넘는 군세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일본군은 1만 4천여 명의 병력과 100척이 넘는 함대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 고니시를 잡아라

전투가 진행되기 전, 명나라 제독 유정은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에게 사자를 보내 회담을 제의하였습니다.

명나라 제독 유정(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이 당시 일본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만 커지고, 명분도 없는 전쟁을 그만두고 하루빨리 일본으로 돌아가려 했으며, 명나라군 역시 임진왜란에 참전한 목적이 전장이 조선을 넘어 명나라 영토까지 확대되는 것을 막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굳이 피를 흘리려 하지 않았고, 양측 모두 전쟁에는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1598년 9월 19일,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하인 마쓰라 시게노부가 성 밖으로 나가지 말 것을 요청했으나 이를 뿌리치고 회담 장소로 이동하였습니다.

마쓰라 시게노부



하지만 명나라 측은 회담을 진행할 생각이 없었고, 사실은 전쟁을 수월하게 끝내기 위해 고니시를 사로잡으려는 계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니시가 성문을 열고 나와 회담 장소에 거의 다다랐을 쯤, 매복해있던 명나라 군사를 고니시가 발견한 후 계책을 눈치채고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버리면서 고니시를 잡는 사로잡는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 순천 왜교성 전투

다음 날인 9월 20일, 조명연합군의 육군(서로군)은 순천 왜교성 공략에 나섰습니다.

순천 왜교성은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의 광양만 안쪽 해안에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에 위치해 있고, 왜성이 축조되기 이전에는 승주 신선리 성으로 불렸으나 육지로 통하는 한쪽 방향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를 만들었고, 이렇게 되니 육상으로 이동할 수가 없어서 육지로 이동하는 길을 다리로 연결해 놓았기 때문에 왜교성(예교)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반응형

정왜기공도권에 실린 순천 왜교성




명나라 제독 유정과 조선의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3만 6천의 군사들은 성벽 쪽으로 돌진했으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있어 한쪽 방향으로만 공격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일본군은 육지로 통하는 다리 쪽으로 병력을 집중 배치해 전력을 쏟아부었습니다.

[정왜기공도권]에 수록된 왜교성 전투



이에 조명연합군이 성에 접근하기도 전에 큰 피해를 입자 멀리서 포격하는 것으로 공세를 전환했으나 명나라 포수들 일부는 군기가 해이해져 있었고, 심지어 조는 병사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고니시가 군사를 보내 성문을 열고 나가 명군 진지로 돌격하니 부총병 오광의 군대가 당황하여 도망쳤고, 이방춘이 이끄는 군대가 가까스로 막아냈습니다.

이 날의 전투에서 명나라군 800여 명전사했고, 최고지휘관인 유정은 전투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앞으로의 전황이 점점 어두워질 뿐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왜교성 전투에 대해 이어서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