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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114] 노량해전(4)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by 역사채우기 2022.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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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의 퇴로를 막아라

순천 왜교성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기 위해 노량으로 들어선 시마즈 요시히로, 소오 요시토시,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일본 수군 500척은 미리 매복해있던 조명연합 수군에게 잔뜩 두들겨맞은 후 육지로 막힌 포구인 관음포를 바다로 착각하고 사지로 들어갔습니다.

바다 '만'의 지형



하지만 고니시는 그 틈을 이용하여 여수 연안을 돌아 남해 방향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이후 시마즈를 위시한 일본 함대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명나라 수군을 공격하여 활로를 열려고 했습니다.

이에 명군 선봉에 있던 부총병 등자룡이 탄 판옥선을 일본 전선이 에워쌌고, 등자룡은 포위된 상태에서도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등자룡은 전사하고 판옥선은 불타버렸습니다.

등자룡(드라마 불멸의이순신 중에서)



곧이어 일본군은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판옥선에도 접근했으나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곧바로 진린을 구해주어 다행히 명군 지휘부가 무너지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일본군은 조명연합군의 포위망을 뚫지 못했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일부는 남해도에 상륙해 목숨을 부지하려 했으며 남은 대다수의 군대는 세키부네의 빠른 기동성을 이용해 판옥선에 배를 붙여 악착같이 달려들었습니다.

남해도의 위치(지도 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당시 상황은 새벽에서 아침이 다가오는 야간이었기 때문에 근접전이 펼쳐진 데다가 일본군이 피해를 무릅쓰고 다가왔기 때문에 양측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상태에서 전투가 진행되었습니다.

또한, 7년간의 전쟁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려는 일본군에 맞서 조선군은 그동안 일본군에게 짓밟히고 무너져내려간 일을 보복하고, 응징하기 위해 이를 갈고 있었으니 전투는 매우 치열했습니다. 

조선군 입장에서 이 원수들을 고이 돌려보낼 수 없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이들을 돌려보낸다면 정유재란 때와 같은 재침이 또 발생할 수 있다는 것도 조선군을 더욱 분전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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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에서는 평상시와는 달리 근접전이 펼쳐졌다(드라마 불멸의이순신 중에서)



그렇기 때문에 조명연합군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음에도 평상시 이순신이 지휘한 해전에 비해 피해가 불가피하게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 장군의 별이 떨어지다

어느새 날은 밝아왔고, 조명연합군은 지옥 같은 포위망을 뚫고 도망가려는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해 추격에 나섰습니다.

이순신의 대장선도 최전선에서 근접전도 마다하지 않고 적선을 1척이라도 더 격침시켜 적을 완전히 섬멸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적선에서 날아온 총알이 이순신의 가슴에 박혔습니다.

노량해전도



총상을 입은 이순신은 그대로 쓰러졌고, 임진년(1592년)에 사천해전 당시 어깨에 총을 맞았을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사천해전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55

 

[임진왜란13] 거북선의 대활약! 사천해전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1차 출정 때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의 연합 함대에 합류하지 못한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전선과 합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5월 27일, 경상우수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쓰러진 이순신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라는 말을 남기고 전사하였습니다.

 


뛰어난 리더십과 엄격한 규율 적용으로 지난 22번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특히 명량에서는 1척으로 333척의 적선을 상대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자급자족으로 군대와 피난민을 관리했고,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견제, 명나라 지휘부의 견제까지 감내했던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승리를 목전에 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초상화

 

 

 

다음 시간에 노량해전의 마지막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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