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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116]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 남해왜성 소탕전

by 역사채우기 202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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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에서 관음포에 갇힌 일본군 일부는 남해도에 상륙한 뒤 남해 선소왜성으로 향했습니다.

[정왜기공도변]에 기록된 남해 선소왜성



이곳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인 소오 요시토시가 수비병 1천 명과 함께 주둔했던 곳이었고, 여기에는 소오 요시토시와 시마즈 요시히로의 부장 키이레 세주노카미, 카바야마 쿠다카 등 1천여 명이 남아있었습니다.

이들은 급히 뗏목을 만들어 창선도로 탈출하기 위해 병력을 실어 나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포구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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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도와 창선도의 위치(지도 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조명 연합수군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노량에서 대승을 거둔 조명 연합수군은 남해도에 적이 상륙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경상우수사 이순신(충무공 이순신과는 동명이인)과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지휘 아래 남해도를 포위한 후 수색하였습니다.

무의공 이순신(드라마 불멸의이순신 중에서)

 


이들은 남해도 곳곳에 일본군이 버리고 간 배를 모두 불태웠고,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일본군 1천여 명을 사살했습니다.


이후 진린이 남해도에 상륙하여 남해 선소왜성에 들어갔으나 성은 텅 비어있었고, 그 안에는 일본군이 싣지 못한 곡식과 조총 등의 각종 무기류, 그리고 소와 말 등의 가축까지 남아있었습니다.

또한, 진린은 수급을 얻을 욕심에 섬의 가옥을 불태워 3천여 석의 양곡이 소실되는 일이 있었고, 뒤늦게 도착한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 역시 수급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드라마 불멸의이순신 중에서)



그는 일본군이 아닌 남해도에 붙잡혀있던 조선 백성들을 발견하고는 모두 목을 베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고, 진린이 불을 질러 산에 피신해있던 백성들이 내려오지 못하니 손문욱이 상황을 보고하여 비로소 작전이 중지되며 전투가 끝났습니다.


이로써 1592년, 부산진성 전투를 시작으로 전개된 7년간의 전쟁이 모두 끝났고, 나머지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임진왜란이 막을 내렸습니다.

 

 

부산진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43

 

[임진왜란1] 전쟁의 시작! 부산진성 전투

https://youtu.be/UhyYSoJbFRU 이번 시간부터는 임진왜란을 시리즈로 이어나가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건조하고 시험까지 모두 완료한 날이 1592년 4월 12일이었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1592년 4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이후 전라도 관찰사 황신이 조선 조정에 일본군에 대한 보복으로 대마도 공격을 제안했으나 실행에는 옮겨지지 않았고, 1609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로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에서 광해군의 조선 조정과 기유약조를 체결하면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국교가 재개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 결과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어느 정도 대치 국면을 이뤘던 양측은 260여 년 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평화에 접어들었습니다.

 

* 운요호 사건 : 일본이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해로 측량을 빌미로 강화도에 군함을 이끌고 와 무력 시위를 한 사건




다음 시간에는 임진왜란이 조선, 일본, 명나라에 끼친 영향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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