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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115] 노량해전(5) 한 명의 적도 놓쳐서는 안된다!

by 역사채우기 2022.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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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지휘관인 이순신은 죽었지만, 아직 전투는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대장선에 타고 있던 이순신의 조카 이완은 이순신의 유언을 받아들여 자신이 이순신의 갑옷을 입고 북을 치며 전투를 진두지휘했으며, 이순신의 직속 부하였던 송희립은 분노하여 더욱 용감히 싸우다 총상을 입고 쓰러졌으나 다행히 전사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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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립(드라마 불멸의이순신 중에서)



이외에도 잔적을 소탕하던 도중에 흥양현감 고득장, 낙안군수 방덕룡, 가리포첨사 이영남 등이 전사할 정도로 전투는 적이 완전히 물러갈 때까지 혼전의 연속이었고, 500척에 달했던 적선 중 정오 무렵, 조명연합군의 포위망을 간신히 뚫고 살아 돌아간 배는 50척에 불과했습니다.

가리포첨사 이영남(드라마 불멸의이순신 중에서)



칠천량해전, 남원성 전투, 사천왜성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던 시마즈였으나 이순신에게는 당해내지 못했으며, 조명연합군은 노량해전에 참전한 일본군 지휘부를 잡지는 못했지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며 임진왜란을 사실상 종결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시마즈 요시히로

 

 

칠천량해전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23

 

[임진왜란81] 한국사 최악의 해전! 칠천량해전(1)

| 원균의 자업자득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지난 출정으로 적선 10척을 깨트렸으나 판옥선은 그보다 훨씬 많은 32척을 잃으면서 전임 통제사였던 이순신과는 180도 다른 성과를 보여주었습니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24

 

[임진왜란82] 칠천량해전(2) 희망을 절망으로 바꾼 원균의 결단

| 아직은 희망이 있다, 그렇지만 원균 휘하에서는 절망뿐이었다. 지난 전투에서 보여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무능한 행보로 많은 군사와 함대를 잃은 조선 수군은 매우 위축되었고, 지친

historicalhistory.tistory.com

 

 

남원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28

 

[임진왜란86] 남원성 전투(1) 사나이 국은을 갚을 때가 이 날이 아닌가!

| 일본군의 전라도 재침공 계획 지난 임진년(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개전 초반, 일본군이 승승장구하며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진출하였으나 결정적 승리를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29

 

[임진왜란87] 남원성전투(2) 전세의 불리함을 딛고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라!

| 남원성 전투 8월 13일, 일본 좌군은 남원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북문, 동문은 하치스카 이에마사, 서문은 고니시 유키나가, 남문은 우키다 히데이에가 담당하기로 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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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왜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48

 

[임진왜란106] 사천왜성전투(1)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를 잡아라!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사로병진책 1598년 8월에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까지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조선에 있던 일본군은 *오대로와 *오봉행의 지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49

 

[임진왜란107] 사천왜성전투(2) 불의의 사고와 엇갈린 희비

명나라 제독 동일원과 조선의 경상우병사 정기룡이 이끄는 4만 대군은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를 공격하기 전, 그들의 방어 전진기지였던 망진왜성, 영춘왜성, 그리고 사천읍성(사천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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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전에서 조명연합군은 적선 수백 척(200척 이상)을 격침시키고, 100척을 나포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조선군이 2~3백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등자룡이 탄 판옥선이 불타면서 판옥선 1척의 손실이 있었습니다. 

격침된 적선(드라마 불멸의이순신 중에서)



전투가 끝나고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바다는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했으며, 다른 명나라군과는 달리 이순신의 엄격한 규율을 따르느라 힘들어했던 명나라 수군들도 슬퍼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이 탄 대장선을 제외한 나머지 배의 군사들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 이순신이 전사한 사실을 모르고 힘껏 싸워 마침내 적을 물리친 것을 두고 나관중[삼국지연의]에서 '죽은 공명(제갈량)이 산 중달(사마의)를 쫓아냈다'는 부분에 빗대어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라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쓰이기도 했습니다.

삼국지연의 삽화

 

 

왜적들이 달아난 후 진린은 사람을 보내 이순신에게 사례하려고 했다.
그때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3번씩이나 배에 엎어지면서 통곡했다.
"노야(老爺, 중국에서 쓰이는 극존칭)께서 오셔서 나를 구해준 것으로 알았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이 모습을 본 모든 군사가 엎드려 통곡하니 바다가 울릴 정도였다.
왜장 유키나가(고니시)는 우리 수군이 적을 쫓아 진영을 지나간 틈을 이용해 빠져나갔다.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은 각 진영에서 통곡을 그치지 않았는데, 마치 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난 듯 슬퍼했다.

그의 영구 행렬이 지나는 곳에서는 모든 백성이 길가에 나와 제사를 지내면서 울부짖었다.
"공께서 우리를 살려주셨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수많은 백성이 영구를 붙들고 울어 길이 막히고, 행렬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라에서는 의정부 우의정을 추증했다.

- 류성룡 [징비록]

 


이순신이 전사한 후 조정에서는 이순신우의정으로 추증했고, 선무공신 1등으로 책록하면서 좌의정으로 추증되었다가 이순신에 관심이 많았던 정조(조선 22대 왕)가

 

"충무공의 그 충성과 위무로서 죽은 뒤에 아직까지 영의정을 가증하지 못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었다."

 

라고 말하며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현충사(출처 : 문화재청)



한편, 조명연합군은 노량해전이 끝난 후 노량해전 도중에 남해도로 상륙한 일본군 잔당 소탕에 나섰습니다.



남해왜성 소탕전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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