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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117] 임진왜란이 조선, 명나라, 일본에 끼친 영향

by 역사채우기 2022.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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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헛된 망상으로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은 1598년, 남해왜성 소탕전을 끝으로 7년간에 걸친 전쟁이 종결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 임진왜란이 조선에 끼친 영향

그리고 조선은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일본을 조선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전쟁을 치렀던 장소가 조선 땅이었기 때문에 조선, 명나라, 일본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여러 전투를 치르면서 군인과 의병이 많이 죽어 국방력이 감소했고, 오랜 전란으로 인한 국토 황폐화, 경작지 감소, 이에 따른 기근과 전염병 발생, 거기다 전공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된 일본군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를 베어 본국으로 보내면서 수많은 백성이 죽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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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에 있는 귀무덤



일례로, 당시 관료였던 이산해가 쓴 시인 [노방원]에는 전쟁의 참혹한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길가에 죽어 있는 세 사람
모두가 유랑하는 사람들이라
까마귀와 솔개에 먹힌 한 사람
지나가던 사람들 차마 못 본다
굶주린 사람들이 살 베간 사람
뼈만 앙상하고 살 한 점 없도다

 


또한, 죽은 사람 외에도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또는 포르투갈 등지로 노비로 팔려나간 사례가 있으며, 이삼평 등의 도자기 도공들은 일본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며 일본의 도자기 산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여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으로도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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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이화여대박물관)



물론,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사명대사손문욱 등을 보내 수천 명의 백성을 돌려받기도 했지만 끌려간 백성 수에 비하면 일부였고, 인구수가 곧 국력이던 전근대 시기에 크나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명대사 영정



 

| 임진왜란이 명나라에 끼친 영향

중국에서는 임진왜란을 만력제의 연호를 따서 만력조선전쟁, 또는 항왜원조전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만력태정이라 불릴 만큼 30여 년 동안이나 국정을 돌보지 않으며 명4대 암군(정덕제, 가정제, 만력제, 천계제)으로 불리는 만력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병부상서 석성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선에 20만이 넘는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였습니다.

만력제(신종)



이외에도 조선에 굶주리고 있는 백성이 많다는 보고를 받자 산둥성과 요동의 쌀 등을 합쳐 백만 석이나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시기 명나라는 만력 3대정(푸베이의 난, 임진왜란, 양응룡의 난)이라 하여 군비 지출이 국가 재정을 넘어설 정도로 막대했기 때문에 명나라 사람들은 만력제를 '*고려 천자'라고 부르며 비꼴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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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우리나라는 조선이었지만 고구려(장수왕 시기부터 고려라 칭함) - 발해(문왕 시기 고려라 칭함) - 고려(왕건, 궁예)로 이어지면서 고려라는 국호가 더 오래 쓰였기 때문에 고려로도 불렸습니다.

 


다행히 명나라 입장에서는 전장을 자국의 영토로 확대하지 않고 임진왜란을 종결시켰으나 앞서 말한 것처럼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었고, 그러는 사이 만주와 연해주 지방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져 임진왜란 발발 이전부터 힘을 키우던 건주여진의 추장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한 후에 후금청나라를 세워 결국에는 청나라에 중원 왕조의 자리를 내주는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누르하치




| 임진왜란이 일본에 끼친 영향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천황의 연호를 따서 분로쿠(임진년)-게이초(정유년)의 역(文禄慶長の役)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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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광기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전쟁에 동원되었지만, 이는 각 지방을 다스리는 다이묘들에게 부담되었기 때문에 일본 전체로 보면 큰 피해는 아니었고, 노량해전에서 시마즈 요시히로, 다치바나 무네시게, 소오 요시토시,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군사가 극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이들 외에 참전했던 가토 기요마사,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의 대다수 일본군은 철수할 때 어느 정도의 병력을 보존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주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의 막바지에 죽은 후에 일본 본토에서는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두고 내분이 일어나 임진왜란이 끝난 지 2년만인 1600년, 이시다 미츠나리를 위시한 서군과 누르하치를 연상시킬 정도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고 힘을 키우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한 동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면서 히데요리는 최고 권력자였지만 허수아비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울지 않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 자의 승리

이후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중심지인 에도(현재의 도쿄)의 지명을 따서 에도 막부가 수립되면서 조선과의 관계 개선에도 노력하여 1609년, 기유약조를 맺었고, 동북아시아는 평화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음 시간에 발해의 역사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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