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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으로 *정명가도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일본군 수십만이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임진왜란)
* 정명가도(가도입명) :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길을 빌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 고경명 등의 의병이 각지에서 일어나 유리한 지형을 적극 활용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며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어 국난 극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전란 중에는 국경인처럼 일본군에 협력한 자들도 있었지만(순왜) 의병의 주축이었던 농민들이 낫과 호미 대신 무기를 든 것은 자기 고향을 지키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그들이 들고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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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인의 반란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7
당시 조선의 세율은 *평균 10% 정도였고, 일본은 칠공삼민이라 해서 무려 70%를 세금으로 뜯어가는 게 일반적이었으며, 다케다 신겐과 같은 인물이 세금을 반만 걷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였습니다.
* 하지만 조선 역시 순조~철종 시기, 그리고 고종(흥선대원군 집권 시기 제외) 재위 때는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으로 세율이 일본 못지 않게 급등했고, 이에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홍경래의 난과 동학농민운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점령한 조선 영토에 조선 백성들의 반발을 누르기 위해 세금을 많이 깎아줬어도 조선 백성들에게는 그조차도 날강도처럼 여겨져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을 것입니다.
일본군 : 세금을 특별히 50%만 걷도록 하지
조선 백성1 : 이런 날도둑놈들이 다 있나!
조선 백성2 : 차라리 조선이 낫다!
다음 시간에는 아군의 손에 죽은 전쟁 영웅들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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