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죽자 고구려는 장남인 연남생이 대막리지를 이었으나 그 동생들(연남건, 연남산)과의 내분으로 연남생이 밀려났고, 연남생은 그 길로 당나라로 투항하였습니다.
조국을 배신한 연남생은 당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고구려 멸망에 앞장섰고,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습니다. (668년)
고구려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위와 같지만, 그 이전에 고구려와 협력하여 피해를 경감시켜주었던 동맹국 돌궐과 백제가 차례로 멸망한 것도 고구려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는데요.
백제는 나당연합군의 침입으로 수도인 사비성이 무너지자 의자왕은 옛 수도였던 웅진성으로 몽진하여 계속 저항하고자 했으나 웅진성주(웅진방령) 예식진이 의자왕을 당나라에 갖다바치면서 백제는 멸망하였습니다. (660년)
* 예식진은 의자왕을 사로잡아 백제를 멸망시킨 공으로 당나라에서 좌위위대장군(궁궐 경비를 담당하는 정3품의 직책)에 임명되었으며, 672년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후로도 백제는 잔존세력들이 4년에 걸쳐 일본(왜국)과 함께 나당연합군에 저항했으나 내분이 일어나 부흥시키지 못하고 궤멸되면서 고구려는 서쪽의 당나라와 남쪽의 신라에 양면전선을 형성하게 되었고, 위에서 말한 연남생의 항복과 계속된 전쟁으로 끝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백제 부흥운동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0
만약, 예식진이 배신하지 않고 충심을 다해 나당연합군에 저항하여 시간을 벌어주었다면, 아직 함락되지 않은 백제의 지방 세력들이 근왕군을 조직해 웅진성 수비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고, 고구려 또한, 이를 좌시하지 않고 군사를 보냈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하지만, 예식진의 배신으로 백제는 내부와 외부 세력이 손 쓸 틈도 없이 너무 빨리 멸망한데다가 구심점을 잃었고, 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포로로 끌려가면서 뒤이어 진행된 백제부흥운동의 세력을 위축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앞서 말한대로 고구려 멸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식진의 나비효과
다음 시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현실적인 이유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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