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만에 발해가 건국되었고, 대조영의 뒤를 이어 대무예(발해 2대 왕, 무왕)가 즉위했을 당시에는 동북쪽의 흑수말갈과 서쪽의 당나라가 발해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대조영의 발해 건국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3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일대기
https://youtu.be/pKAqd2Th6LA | 연개소문의 죽음과 고구려의 분열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들은 대막리지의 자리를 놓고 내전을 벌이면서 고구려의 상황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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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 흑수말갈이 보고 없이 당나라와 접촉을 시도하자 무왕은 아우인 대문예에게 흑수말갈 정벌을 명했는데 문예는 당나라에서 숙위로 머물렀기 때문에 당나라의 강성함과 발해가 건국 초기인 점을 들어 출정을 반대했습니다.
문예 : 당나라는 발해 국력의 1만 배나 됩니다. 발해가 10만이면 당나라는 10억?
하지만 무왕이 출정을 강행하고, 재차 반대한 문예에게 소환령을 내리자 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해 버렸습니다.
당나라로 들어간 문예는 좌효위대장군에 제수되었고, 위기감을 느낀 무왕은 등주를 초토화시키는 승부수를 띄운 데 이어 낙양 천진교로 자객을 보내 문예의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에 당나라 현종(당나라 6대 황제)도 나당전쟁 이후로 서먹서먹해진 신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신라로 하여금 발해의 후방을 공격하게 했으나 잘 막아냈고, 발해는 무왕이 친정하여 돌궐, 거란과 연합군을 결성한 뒤 마도산에서 대문예가 이끄는 당나라군에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임진왜란 때 적과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안전했던 곳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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