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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7] 일본군 조총병과 조선 기마부대의 회전! 탄금대 전투

by 역사채우기 2021.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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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1jEAWJFhjrg

 

| 충주 탄금대 전투

한편, 일본군 역시 조령이 천하의 요새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령을 넘는 것을 두려워했으나 막상 정찰해보니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아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4월 28일,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은 군대를 좌군, 우군, 본군, 별동대, 이렇게 넷으로 나눈 후 자신이 본군을 맡아 진군하였고, 민가를 불태우자 조선군은 연기를 보고 일본군이 근처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때 신립은 일본군을 보고 기병대를 보내 고니시의 본군을 향해 돌격을 지시하면서 전투는 시작되었고, 조선군은 논밭과 습지, 거기다 비까지 내린 땅을 딛고 이동하는 것이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였습니다.
이에 맞서 고니시의 본군은 조총을 발사했고, 기동력이 떨어진 조선군은 일본군에게 그저 좋은 표적이 될 뿐이었습니다.

조선군 정예 기마병과 일본 선봉군 조총병의 대결


그러는 사이 일본의 좌ㆍ우군이 조선군에 협공을 가하자 조선군은 사기가 급격히 떨어져 피해가 속출하였고, 고니시는 총공격을 명령합니다.
사면으로 포위되어 사지에 몰린 조선군은 강물에 뛰어들었고,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로 익사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때 일본 제2군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근처를 지나가면서 고니시 군대의 용맹에 감탄을 표했지만, 숙적인 고니시가 전공을 세우는 것은 질투했기 때문에 자신의 군대도 참여할 것을 요청했으나 고니시는 거절하였습니다.

가토 기요마사

 

마침내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렀으나 삼도순변사 신립과 종사관 김여물은 적병 수십 명을 베며 결사항전하였고, 신립은 손에 열이 날 정도로 죽을 힘을 다해 일본군에게 활을 쏘고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다 손의 열을 식히러 강물에 들어갔다 나와서 전투를 지속하다가 다시 열이 나면 강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9번이나 반복하여 그 장소를 구초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구초대 사진


그렇게 신립김여물은 화살이 다 떨어지고, 기운도 떨어지자 남한강에 몸을 던져 장렬하게 전사하면서 충주 탄금대 전투는 종료되었습니다.


조선군은 이 전투에서 지휘부를 비롯해 주력군 모두를 잃었으며 이일은 사잇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 도망치는 와중에 마주한 일본군을 활로 쏴 죽여 수급을 취했고, 천신만고 끝에 한양에 도착해 탄금대 전투의 패배를 전합니다.
한편,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수급 3천 개를 취하고, 수백 명의 포로를 얻었으며 조선의 주력군이 궤멸되면서 도읍인 한양까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진군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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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충주의 백성들은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할 때처럼 이번에도 신립이 이길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피난을 가지 않았고, 그랬기 때문에 다른 고을보다 일본군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조선조정 역시 과거 명성과 더불어 당시 조선 최고의 장수인 신립이 승리하는 쪽으로 큰 기대를 걸었으며, 주력군인 경군과 기병의 대부분을 신립에게 주었기 때문에 한양을 수비할 군사가 턱없이 부족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탄금대에서 조선군은 와해된 반면, 일본군은 큰 피해를 보지 않고 진군해오고 있었습니다.


이후 이일에게 패전보를 받은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두려움에 휩싸였고 신하들은 앞다투어 도망쳤습니다.

탄금대 전투의 패전보를 받아보고 놀라는 선조(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후일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명나라 제독 이여송조령을 지나면서

 

"조령과 같은 천하의 요새를 지키지 않다니 신 총병(신립)은 지모가 없는 장수라 말할 만하다"

 

라고 말하며 조령을 버린 신립을 비웃었습니다.

 



| 신립과 곤지암

그리고 신립이 죽은 후에 내려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탄금대 전투 이후 남한강에 빠져 죽은 신립을 건져냈는데 당장이라도 호령할 기세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고 합니다.
병사들은 시체를 경기도 광주로 옮겨서 장사를 지냈는데 묘지 가까운 곳에 고양이 모양을 한 바위가 생겼고, 그 바위 앞을 말을 타고 지나가려고 하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어느 장군이 죽어서까지 왜 행인을 괴롭히냐고 바위에 핀잔을 주자 벼락이 치면서 바위가 갈라졌고, 그 자리에 커다란 연못이 생겼습니다.
그 이후로는 말발굽이 땅에 붙는 일이 없었고, 사람들은 그 바위를 곤지암으로 불렀습니다.

곤지암 사진

 

 

다음 시간에는 [임진왜란8] 한강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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