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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8] 선조의 파천과 한강 전투

by 역사채우기 2021.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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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30ESQmo0aSM

 

 

1592년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부산김해, 상주가 연이어 무너졌고, 4월 28일에는 믿었던 신립마저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조선 조정은 위기에 봉착합니다.

이미 신립에게 수도 한양을 방어하던 군사와 경군의 상당수를 보내주었던 터라 수도를 방어할 군사는 너무나도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지킬 군사가 없는 성



 

| 임금은 수도 한양을 버리고...

그래서 4월 29일,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몽진을 결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묘사직을 그대로 일본군에게 내줄 수는 없었기에 김명원을 도원수로, 신각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천 명 남짓한 군사로 한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우의정 이양원을 유도대장으로 삼아 한양 도성을 수비하게 하였으며, 전시 중에 상황이 급변할 것을 대비하여 서둘러 광해군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세자로 책봉되는 광해군(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그리고는 임해군을 함경도로, 순화군을 강원도로 보내 각지에서 민심을 수습하고, 근왕병을 모집하게 했습니다.

세자 책봉에 이어서 강원도와 함경도로 파견되는 왕자들


다음 날인 4월 30일 새벽, 선조는 경복궁 인정전을 나왔고, 밖에는 문무백관들이 모여있었는데 비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얼마 후, 어가(임금이 타던 수레)가 떠나자, 성난 백성들은 내탕고의 재물을 약탈한 후 장례원형조에 불을 질러 노비 문서를 불태워버렸습니다.

 

* 내탕고 : 왕실의 재물을 보관하던 곳간

* 장례원 : 노비 소송과 관리를 담당한 기관

* 형조 : 법률과 노비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



이윽고 불은 경복궁창덕궁, 그리고 창경궁까지 번졌고, 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여러 서적이 모두 불에 타 버렸으며, 유도대장 이양원이 몇 사람을 베며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소수의 군사와 혼란한 상황을 틈타 탈영병이 속출하는 상황 속에서 수많은 군중을 통제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 한강 전투

한편, 일본군은 1군의 고니시와 2군의 가토가 각각 한양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었으며

 

5월 2일, 한강에 다다른 일본 제1군은 강을 도하하기에 앞서 소수의 군사가 강을 헤엄쳐오자 조선군은 지레 겁을 먹어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거기다 일본군이 쏜 포환이 정자 위에 떨어지자 김명원도 무기를 강에다 버린 후 도망쳐버렸고, 도성을 수비하던 이양원 역시 그 소식을 듣자 한양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소수의 헤엄치는 병사들이 무서워 도망친 조선군


이렇게 조선의 수도 한양은 전쟁이 시작된 지 20일 만에 아무런 전투 없이 일본군의 손에 내던져졌고, 일본군은 무혈입성하게 됩니다.

5월 2일, 한양의 4대문에 다다른 일본 제1군은 조선군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매복이 염려되어 쉽게 입성하지 못했습니다.

고니시 : 천하의 요새 조령을 버린 것도 모자라 수도인 한양까지 버렸을 리가 없지

그랬기에 소수의 인원을 뽑아 성 내부를 철저하게 수색한 뒤 다음날, 정말로 수비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입성했습니다.
그렇게 성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제 조선의 왕을 잡고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들떠있었으나 궁궐은 불에 타 재만 남아있었고, 왕은 이미 도망가고 난 후였습니다.

불에 탄 경복궁(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고니시는 일본군 중 제일 먼저 수도를 점령했지만, 왕을 잡지 못했기에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고니시 : 왕은 백성들과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거나 항복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일본의 전국시대에는 각 지역의 영토를 다스리던 영주인 다이묘가 위와 같이 행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다이묘도 아닌 일국의 왕이 도망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할복 또는 항복



얼마 후 일본 제2군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한양에 입성하였고, 둘은 앞으로의 진군 계획에 대해 논의한 후 고니시평안도 쪽으로, 가토함경도 쪽으로 진군하기로 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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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로 진군하는 고니시와 함경도로 진군하는 가토


그런데, 이렇게 조선이 손쉽게 수도를 내준 까닭은 전쟁 전, 조선통신사를 보내 외침이 있을 것을 감지했고, 그에 따라 전쟁 준비도 어느 정도 했으나 조선이 생각한 일본군의 규모는 이전의 삼포왜란사량진왜변 정도였고 임진왜란은 조선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어 20만이나 되는 군대가 침입한 것이었기에 이런 참담한 결과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 삼포왜란 : 1510년, 내이포, 염포, 부산포의 일본인들이 부당한 대우에 앙심을 품고 대마도 도주의 지원을 받아 난을 일으킨 사건

* 사량진왜변 : 삼포왜란 이후 체결한 임신약조의 결과로 일본인의 교역량이 크게 줄자, 일본의 불만이 높아지던 중 왜선 20여 척이 사량진(지금의 경상남도 통영시)을 침입한 사건

조선통신사 행렬도



또한, 고려가 건국 초부터 말기까지 거란의 침입, 몽골의 침입,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등 엄청난 외침을 겪은 것과는 달리 조선은 건국 이래 200년 동안 커다란 외침이 없었기 때문에 전쟁 준비에 안일한 태도로 일관했던 것도 한몫했습니다.

이렇게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육지와 바다 모두 답이 없고, 한심한 작태만 보여주고 있었으나 1년 전 초고속 승진을 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비해 철저한 훈련을 완료한 상태였습니다.

임진왜란 직전 초고속 승진을 한 이순신 장군

 

 

다음 시간에는 [임진왜란9] 옥포해전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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