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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9] 조선군의 첫 승리! 옥포 해전

by 역사채우기 2021.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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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1IPxGjlc8kI

 

| 이순신은 누구인가?

이순신은 1년 전만 해도 정읍 현감(종6품)으로 근무하며 일개 수령에 지나지 않았으나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류성룡의 추천으로 품계를 몇 단계나 뛰어넘으며 전라좌수사(정3품)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간원과 조정 대신들 모두 반대하였으나 선조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순신만은 승진시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조는 반대를 피하기 위해 이순신을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사로 임명하였고, 역시 부임하기 전에 전라좌수사로 임명하였습니다.

이순신의 천거를 주장하는 선조(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이는 이순신류성룡과의 개인적인 친분보다는 6진에 있던 시절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정읍 현감으로 근무했을 때에도 선정을 베풀었으며, 그리고 청렴결백한데도 한직에 머물러있었다는 것을 선조도 알고 있었기에 강행한 조치였습니다.

 

* 4군과 6진 : 조선 세종 때 최윤덕과 김종서가 두만강까지 영토를 확장하면서 개척한 4군과 6진으로 함경도 방면에 위치해 있음


참고로, 전 전라좌수사는 원균이었으나 불과 하루 만에 이전의 평판이 나빠 탄핵을 받고 이순신으로 교체된 것이었습니다.

조선군 최악의 팀킬러 원균


그렇게 전라좌수사가 된 이순신은 실전에 대비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아 전라좌수군을 강군으로 육성하였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무기 개발에도 열중하였습니다.

 

거북선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33

 

조선 최고의 돌격전함! 거북선

https://youtu.be/4bkZUX0zezw 이번 시간에는 조선 최고의 돌격전함인 거북선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태종 시기 첫 거북선 거북선은 조선 초기 1415년(태종 15년),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합니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은 싸워보지도 않고 전선을 자침시킨 후 도주하였고, 육지에서는 정발, 송상현, 윤흥신 등이 결사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파죽지세의 일본군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 옥포 해전

이러한 상황에서 경상우수사 원균당포 앞바다(지금의 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로 나와 이순신과 함께 싸울 것을 요청했으나 이순신은 자신의 관할 구역이 아니었으므로 조정에 보고하여 승인받은 후 이동하려는 한편, 전라우수사 이억기와도 연합하여 싸우려고 했습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

 

하지만 이억기는 약속한 날에 오지 않아 이순신은 더 기다릴 것인지 그냥 가야 할 것인지 고민하였으나 녹도만호 정운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으니 출전해야 합니다"

라고 간곡히 요청하자 5월 4일,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어선) 46척을 이끌고 출전하여 다음날 당포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거북선이 출전하지 않은 것은 거북선이 건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좀 더 필요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출전하는 조선수군의 주력 함선 판옥선

 

이순신당포에 도착했으나 만나기로 한 원균은 없었고, 원균은 뒤늦게 판옥선 1척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후 경상우수영 휘하의 판옥선 3척과 협선 2척이 합류합니다.

개전 초반 70척 혹은 100척을 싸워보지도 않고 날려먹은 채 소수의 판옥선만 합류하는 원균

해진도(출처 : http://encykorea.aks.ac.kr/)


이렇게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의 연합함대는 송미포(거제시 남부면 다대리로 추정)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5월 7일, 가덕도로 향하고 있었는데 옥포 앞바다(지금의 경남 거제시 옥포동)에서 사도첨사 김완이 일본 수군을 발견했다는 신호로 신기전을 쏘아 올렸습니다.

 


신기전을 본 이순신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태산처럼 무겁고 침착하게 행동하라!"

라는 명령과 함께 옥포로 진격을 명했습니다.

옥포의 일본 수군은 50척 정도 정박해 있었고, 도도 다카토라의 지휘 하에 노략질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도도 다카토라


그러다 조선 수군의 갑작스러운 화포 공격에 뭇매를 맞고 적선은 하나둘씩 격침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순신은 보다 큰 타격을 주기 위해 돌격을 명령했고, 전투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일본 수군은 제대로 응전하지 못한 채 조선군의 화살을 맞고 쓰러져갔으며 해안을 따라 도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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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이 전투에서 조선의 연합 수군은 적선 26척을 격침시켰으며, 포로 3명을 구출하는 성과까지 거두는 한편, 사망자는 없었고 부상자는 3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적에 의한 부상자는 1명이었으나 나머지 부상자 2명은 전공에 욕심을 낸 원균이 전라좌수군이 포획한 적선을 빼앗으려 했고, 병사들이 반대하자 아군을 향해 활을 쏘아 생긴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조선수군은 옥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두면서 일본군을 만났다 하면 패배하거나 도망치기 바빴던 조선군의 사기를 드높여주었고, 일본군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 합포 해전ㆍ적진포 해전

이날 오후, 전투를 마친 전라좌수군은 뒤로 물러나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했는데 적선 5척이 지나간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합포(창원시 마산합포구)로 이동하였고,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보자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숨어서 조총을 쏘았습니다.

숨어서 조총 쏘는 일본군(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이순신은 상륙하여 도망간 적을 뒤쫓고 싶었으나 위험부담이 너무 컸으므로 일본 수군이 버리고 간 배 5척을 모두 격침시키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2차례의 전투로 지친 조선 수군은 남포 앞바다에서 휴식을 취했고, 다음 날, 진해 고리량13척의 적선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적진포에서 11척의 적선을 격침시키면서 1차 출전을 완벽한 승리로 마무리 지은 뒤 5월 9일, 본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로써 조선수군의 연합함대는 1차 출정에서 3차례의 전투를 모두 승리하였고, 50척의 적선을 분멸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차 출전에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모두 승리한 이순신

 

 

다음 시간에는 조선 육군의 첫 승리인 해유령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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