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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12] 홍의장군 곽재우와 정암진 전투

by 역사채우기 2021.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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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의 전라도 진군 작전

임진왜란 발발 후 부산진성 전투를 시작으로 임진강 전투에 이르기까지 조선군의 연이은 패전도주
조선의 국토 중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의 대부분은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군은 수로를 통한 수륙병진 작전을 위해, 그리고 아직 점령하지 못한 조선의 주요 곡창지대 중
하나인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해 일본 제6군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필두로 전라도로 진군하게 됩니다.

 

수륙병진 작전 : 바다와 육지 동시에 공격하여 나아가는 작전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자신의 부하 안코쿠지 에케이에게 군사 2천을 주어 경남 의령으로 진군하게 하였고
일본군의 이동 소식을 알게 된 곽재우는 자신을 따라 종군한 의병 50여 명을 이끌고 정암진(경남 의령)에 매복합니다.


이에 앞서 곽재우는 4월 22일, 자신과 친분이 있던 사람과 노비를 끌어들여 의병을 일으킨 후 5월 4일, 고작 4명으로 일본 수송선 3척을 물리쳤으며, 5월 6일에는 13명으로 수송선 13척을 물리쳤다는 믿기 어려운 기록이 있습니다. (기강 전투)

홍의장군 곽재우 기마도

 

| 정암진 전투

그렇게 일본군은 강을 건너기 전 정암진 부근에 정찰대를 먼저 보내서 본대가 지나갈 길을 따라 수심이 얕은 곳에 나무 푯말을 꽂아 놓았는데 그 모습을 본 곽재우와 의병들은 일본군 정찰대가 빠져나가자마자 나무 푯말의 방향을 늪지대가 있는 곳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정암진 사진(솥바위)



이후, 그 일을 알지 못했던 일본군은 의병들이 유인해놓은 매복 지점으로 들어왔고, 늪지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미리 매복해있던 곽재우와 의병들은 일본군을 향해 무차별적인 기습을 가했고, 그 결과 일본 제6군의 선봉대는 2천여 명은 불과 50여 명의 의병에게 크게 패배했으며, 전라도 진출도 보류하였습니다.

역시 의병하면 곽재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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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진 전투 민족기록화


이렇게 정암진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곽재우에게 초유사 김성일의 도움과 오운, 박사제 등의 병력이 합류하면서 4천여 명을 이끄는 군세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 김성일 : 당파는 동인으로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다온 후 선조에게 외침(임진왜란)은 없을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사형될 뻔하다가 경상도의 민심을 수습하기에 적절한 인물로 판단되어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발언으로 왜란에 대한 방비를 못한 것에 매우 후회했고, 죽는 그날까지 나라를 위해 전란을 극복하기 위해 힘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의병의 활약

또한, 이 전투는 일본군의 병력 손실과 전라도 진출 실패만큼이나 두려운 일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병의 존재입니다.

의병으로는 가장 유명한 사진인 구한말의 의병


일본군은 전국시대를 거치며 다른 영지를 점령하면 점령된 영지의 백성들은 대부분 저항하지 않고 점령군의 주민이 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군의 예상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유팽로(의령에서 첫 번째로 의병을 일으킨 인물), 곽재우 등을 필두로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면서 일본군을 향해 매복, 기습 등의 게릴라전을 펼쳤고, 의병은 해당 지역 출신이 많아 주변 지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은 병력으로도 큰 타격을 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일본군이 전쟁 초기 너무나도 급속도로 북상한 탓에 육로로 최전방에 있는 부대까지 보급하는데 어려움이 훨씬 커졌습니다.
게다가 바다이순신 장군이 틀어막고 있었으니 수로로는 더더욱 보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일본군은 전황이 조금씩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육지에서는 의병, 바다에서는 이순신!


 

다음 시간에는 이순신 장군의 4번째 해전이자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한 전투인 사천해전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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