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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18] 조선 최악의 전투! 용인 전투

by 역사채우기 2021.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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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582iYHooDQ

| 군사 수가 전투의 모든 것은 아니었으니..

6월 5일의 전투삼도근왕군의 사기는 매우 떨어졌고, 이광(전라도순찰사이자 삼도근왕군의 맹주)은 진을 옮기기 전에 지형이 어떤지 탐지해보자는 윤선각(윤국형이라고도 하며, 충청도순찰사)의 조언을 듣지 않고
신시(오후 3시~5시)에 진을 광교산 근처로 옮겼습니다.

 

* 광교산 : 현재의 수원시와 용인시에 걸쳐있는 산으로, 광교신도시가 인근에 있습니다.

 

* 6월 5일의 전투는 용인 전투의 일부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59

 

[임진왜란17] 8만의 군사를 동원한 조선! 반격의 서막이 될 것인가?

| 조선! 개국 이래 최대 규모의 군사 결집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후 초기에는 일본군에게 패하거나 도주하기 바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 한양까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바다에

historicalhistory.tistory.com



6월 6일 아침, 삼도근왕군은 광교산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는데 쇠로 만든 탈을 쓰고 백마를 탄 부대가 칼을 휘두르며 조선군 앞으로 돌진해왔습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군대가 온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일본군의 후방에 있던 부대는 산골짜기를 따라 깃발을 휘날리며 군사의 수가 많아보이게 속인 후 조총을 쏘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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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전투(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그러자 삼도근왕군은 혼비백산해서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듯 급속도로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지휘관부터 병사에 이르기까지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도망쳤으며, 그들이 버리고 간 깃발, 군량, 무기, 의복 등은 개울을 메울 정도로 엄청났기 때문에 일본군은 그것을 불태우다가 지쳐서 그대로 내버려 둘 정도였습니다.

 

1600명의 일본군 중 전투로 인한 일부 사상자를 뺀 병사들이 13만에 달하는(피난민 포함) 부대의 군수물자를 처리하는 일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덕에 산골짜기에 숨어있던 백성들이 밤에 몰래 주워다가 생계를 유지했다는 웃지 못할 기록이 전해집니다...

 


이 전투로 조선은 한양 수복에 실패하면서 전황을 유리하게 만들 기회를 또 놓치고 말았고, 전투를 지휘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와키자카기]에 따르면 이틀 간의 전투로 수급 1천여 급을 취하고, 2백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사 후 널브러진 시체(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또한,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군세가 제일 컸고, 맹주였기 때문에 대패한 죄로 파직된 후 유배를 갔으며, 충청도관찰사 윤선각은 공주로, 경상도관찰사 김수는 경상우도로 돌아가면서 구심점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용인 전투에서 조선군의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이 전투의 패배로 조선은 용인 전투에서 동원했던 만큼의 군대를 더이상 갖추지 못했으며, 자력으로 한양을 탈환할 힘을 잃었다는 것이 치명적이었습니다.

다만, 황진과 중위장(광주목사) 권율만이 군대를 온전히 이끌고 후퇴하여 이후 일본군의 전라도 진군을 막을 군사를 조금이나마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훗날 행주대첩에서 대승하는 권율 장군

 


| 왜 패배했을까?

아래는 용인 전투와 이 전투를 총지휘한 이광에 대해 당대 사람들이 평한 글입니다. 

(인용)
용인 전투는 마치 봄놀이 같았다
- 류성룡 [징비록]

이광은 어리석고 겁이 많아서 병법을 알지 못했으니, 행군할 때 군사들을 양을 몰아 풀 먹이는 것 같이 했으므로 통일성이 없었으며 앞과 뒤를 서로 알지도 못하였다
- 기재사초

우리들은 백면 서생으로 병가의 일을 알지 못하여 규모와 계획이 몹시 졸렬해서 마침내 이런 실패를 당했으니 지금도 생각하면 원통하나 어찌하랴
윤선각 [문수만록]

 

 

 

다음 시간에는 제1차 평양성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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