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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20]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아라! 웅치 전투

by 역사채우기 2021.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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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6군을 이끌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조선을 분할통치하자는 계획에 따라 전라도로 진출하려 하였으나 곽재우의 의병에게 정암진에서 패배하여 성주로 퇴각하면서 잠시 계획을 보류하였습니다.

 

정암진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54

 

[임진왜란12] 홍의장군 곽재우와 정암진 전투

| 일본군의 전라도 진군 작전 임진왜란 발발 후 부산진성 전투를 시작으로 임진강 전투에 이르기까지 조선군의 연이은 패전과 도주로 조선의 국토 중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의 대부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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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라도를 수중에 넣기 위해 다시금 진군하였고, 일본군의 진군 소식을 들은 전라감사 이광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을 금산에, 이계정을 육십령에, 장의현을 부항(김천시 부항면)에, 김종례를 동을거지에 배치해 수비를 강화하였습니다.

 

* 육십령 :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전북 장수군 계남면 사이에 있는 고개

 


하지만 고바야카와 군대의 금산성 공격으로 6월 23일, 금산군수 권종이 전사하였고, 곽영의 군대가 고산현(현재의 전북 완주군)으로 퇴각하면서 금산성(현재의 충청도 금산)이 점령당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하 안코쿠지 에케이는 스스로를 전라감사라고 칭하면서 격문을 뿌린 후 금산에서 고바야카와의 군대에 합류하였고, 전라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전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습니다.

안코쿠지 에케이(왼쪽)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른쪽)



일본군이 금산에서 전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2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진안전주를 연결하는 고개인 웅치(곰티재)를 넘는 길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진산군과 고산현의 경계에 있는 이치(배티재)를 넘는 길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조선군은 웅치이치에 각각 군사를 배치했고, 이치에는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의 군대 1,500여 명이 지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웅치에는 3개 방어선을 구축하게 했는데 산 아래에 의병장 황박과 오정달이 지키게 하고(제 1방어선), 산 중턱에는 나주 판관 이복남이(제 2방어선), 산 정상에는 김제 군수 정담(최후 방어선)이 각각 지키도록 했습니다.  

웅치와 이치에 각각 배치된 조선군(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7월 7일 새벽, 일본군은 조총을 쏘며 웅치 고개로 진군해왔고, 이에 맞서 황박과 오정달의 1진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결사항전을 각오하고 끝까지 싸웠지만, 아침이 되면서 오정달이 전사하였고 제 1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의병장 황박과 남은 군사들은 나주 판관 이복남이 지키고 있는 산 중턱으로 후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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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군은 일본군에 비하면 수적으로 매우 열세인 상황이었지만 이 전투에서만큼은 지금껏 보여주었던 불명예를 모두 털어버리고 환골탈태하며 단병접전에 능한 일본군에 맞서 일진일퇴의 양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웅치에서의 조선군 일부가 전라감사 이광이 이끌었던 삼도근왕군에서 수습된 군사라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전라감사 이광삼도근왕군이 벌인 전투(용인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60

 

[임진왜란18] 조선 최악의 전투! 용인 전투

| 군사 수가 전투의 모든 것은 아니었으니.. 6월 5일의 전투로 삼도근왕군의 사기는 매우 떨어졌고, 이광(전라도순찰사이자 삼도근왕군의 맹주)은 진을 옮기기 전에 지형이 어떤지 탐지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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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투가 계속되면서 이복남의 2진 역시 무너져버렸고, 조선군은 김제 군수 정담이 있는 최후방어선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 정상의 전투에서 김제 군수 정담은 백마를 탄 적장을 향해 활을 쏘아 죽였으며, 1진과 2진에서의 전투와 다르지 않게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니 일본군은 피해가 갈수록 커지고, 날도 저물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군의 화살이 다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일본군이 재차 공격을 감행해니 조선군은 밀리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김제 군수 정담과 강운박형길, 종사관 이봉 등이 전사하였습니다.

 

 

당시 정담은 부하들의 후퇴 권유에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 지언정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는 없다

라고 말하며 끝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웅치는 일본군이 점령하였고, 웅치 고개는 조선군의 시체로 뒤덮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군 역시 피해는 만만치 않았으며, 일본군은 용맹하게 싸운 조선군의 분투에 감동하여 전사한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는 '조선의 충성스런 넋을 기린다'(弔朝鮮國忠肝義膽)(조 조선국 충간의담)는 푯말을 세우고 지나갔습니다. 

웅치 전적비(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위의 사진은 일본군이 만든 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에서 조상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한편, 이복남과 황박이 이끄는 군대는 가까스로 안덕원(전주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곳) 계곡으로 후퇴하였고, 그곳에서 추격해올 일본군을 상대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안덕원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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