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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21] 웅치의 조선군은 아직 죽지 않았다! 안덕원 전투

by 역사채우기 2021.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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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 제6군은 웅치에서 의병장 황박오정달의 제 1방어선과 나주 판관 이복남의 제 2방어선, 그리고 김제 군수 정담의 최후방어선까지 혈전 끝에 무너뜨리면서 웅치를 기어코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전투에서 김제 군수 정담과 많은 군사들이 전사했으나 일본군 역시 큰 피해를 입었고, 7월 9일에는 일본군이 그들의 목표였던 전주 부근으로 진출했습니다.

 


이에 맞서 조선군은 전라감사 이광의 지휘 아래 안덕원에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주성은 병사한 전주부윤 권수를 대신해 이정란이 지키게 했으며, 이광 본인은 남고산성(전주)을 최후방어선으로 삼아 지키고 있었습니다.

전주 남고산성 사진

* 남고산성은 고덕산 자락을 따라 쌓았기 때문에 고덕산성으로도 부르며,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수도인 완산주(전주)의 방어를 위해 쌓았다 하여 견훤성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이광은 남원에서 웅치로 이동 중이던 동복현감 황진을 안덕원으로 보내 그곳에 있는 군대를 지원하게 하였습니다. 

한편, 일본군은 전주 부근까지는 진군했으나 지난 전투에서의 피해가 컸기 때문에 전주성을 공격하지는 못했고 잠시 후퇴하여 안덕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안덕원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소양평


안덕원에는 나주 판관 이복남이 웅치 전투에서 수습한 조선군의 잔여 부대가 매복한 상태였고, 안코쿠지 에케이의 부대가 골짜기로 들어오자 기습을 가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때를 맞추어 동복현감 황진의 부대가 합류하여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하면서 일본군은 조선군의 협공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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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 장군



이때 황진은 1590년에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 사 온 일본도를 휘두르며 일본군을 베어 넘겼고, 일본군이 퇴각하자 황진은 추격하여 더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일본도(출처 : ko.wikipedia.org)

 


안덕원 전투에서 황진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강한집]과 [계곡집][고대일록][포저집] 등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이 전주로 향하자 공(황진)이 병력을 이끌고 그곳으로 가다가 안덕원에서 적을 만나 접전을 벌인 결과 크게 격파하였다. 이 공으로 훈련원 판관(종5품)으로 관직이 승진되었다. 
- 계곡집
공(황진)이 곧장 안덕원으로 달려가서 적병을 요격하고 대파하여 거의 섬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장이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그 부하들이 시체를 싣고 갈 틈도 없어서 길옆에 묻어두고 달아났다.
- 포저집

 


이 전투로 조선군은 안코쿠지 에케이 부대의 1개 진을 몰살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웅치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데다 안덕원에서는 패배했는데 그들의 목표였던 전주성은 이정란이 이미 방어선을 구축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전주성 공격을 잠시 미루고 7월 10일, 웅치를 넘어 진안과 금산으로 후퇴합니다. 
이번에도 전라도 진출에 실패한 일본군



다음 시간에는 제1차 금산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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